스승의 자리 노린 제자의 흉계-2...

나는 학장실로 막바로 들어가 따지려다가 학장실 앞에 있는 박갑성 교무과장 방에 먼저 들렀다. 박갑성 씨와 나는 교무과장, 학생과장을 나란히 해서 각별히 지냈을 뿐 아니라 김종영 씨와 더불어 서울대 미술대학의 삼총사로 통하던 터였다. 김종영, 박갑성 씨는 장발 학장의 휘문고보(徽文高普) 제자이고 동경 유학 시절에 두 사람이 한 방에 하숙하던 친구였다. 나는 타향 벗이지만 직장의 동료로, 술친구로 역시 무간한 사이였다.

그때 박 과장 방에 들어가 하소연 겸해 화풀이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 학장을 존경했는데, 요즘 나한테 하는 걸 보니 비인간이더라. 오늘 아무개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앞에서 내 욕까지 하더라니. 내게 잘못이 있으면 직접 말할 것이지, 제자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냐”고 포문을 열었다.

나는 박 과장이 당사자가 아니어서 속에 있는 대로 좀 과격하게 얘기했다.

“나 오늘 사표 쓰고 장발 씨하고 투쟁해야겠어. 장 학장은 털면 먼지 안 나나. 언제까지 학장 노릇화고 잘 지내는지 두고 봐야겠어.” 하고 퍼부어댔다. 그랬더니 박 과장이 내 손을 꼭 잡고 “월전, 흥분하지 말고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하며 내가 미술대 학장운동한다는 소문의 진원을 털어놓았다.

박갑성 씨는 “월전이 중앙청 식당에서 소전을 만나 학장운동 한다는 이야기도, 소전이 월전이 맡겼다는 이력서를 꺼내 보이면서 이게 월전이 내게 미술대 학장 시켜달라고 준 이력서야 라고 말한 사람도 바로 당신에게 장 학장이 욕하더라고 말한 그 사람”이라고 말 하면서 그동안의 일의 전말을 털어놨다.

그제서야 “이간질 한 것이구나”하는 감이 잡혔지만 그대로 물러날 수 없어 학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들으니 아무개 앞에서 내 욕을 하셨다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하고 따졌다. 그랬더니 박갑성 씨가 앞서 가로막으며 장 학장에게 “중앙청 식당에서 소전을 만난 것은 철농이 이 대통령 송수전 때문에 나오라고 해서 여러 사람이 함께 회동한 것이랍니다”고 학장운동한다는 소문은 오해였음을 밝혔다.

▲ 55~56년 무렵 서울대 미대 제5회 전시회 때 한자리에 모인 교수진. 앞줄 왼쪽부터 송병돈, 이순석, 장발, 노수현, 장우성. 뒷줄 왼쪽부터 김종영, 박갑성, 김흥수, 김정환, 백태원, 박세원, 김병기, 김세중의 모습.(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발굴해 한국미술기록보존소에 기증한 사진이다.

장 학장은 겸연쩍은 듯 듣고만 있다가 “이게 모두 나의 덕 없는 소치”라며 “없었던 일로 하자”고 사과했다. 어떤 자가 나를 중상모략하려고 꾸민 일인 줄 알았지만 밝힐 것은 밝혀야겠기에 장 학장에게 “이력서 이야기도 소전을 데려와서 삼자대면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갑성 씨가 “뭐 그럴 것 있소. 이제 다 끝난 일인데 그만둡시다”고 말렸다.

그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을지 몰라도 나는 피해자 입장에서 그냥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때 소전은 지방 유권자 등쌀에 집을 두고 명동 사보이호텔 10층 몇호실엔가에 묵고 있었다. 로비에서 전화를 걸어 긴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니까 커피숍으로 내려왔다.

나는 소전을 보고 다짜고짜로 “요 전에 내가 맡긴 이력서 돌려주세요” 했더니 “이력서라니?” 하고 어리둥절했다. 내가 똑바로 바라보면서 “학장운동한 이력서“ 말이라고 싸늘하게 말했더니, 소전은 예의 전라도 사투리로 “사람 환장허것네, 무슨 엉뚱한 소리여?” 하고 오히려 궁금해 했다. ”아니 당신 아무개에게 ‘이게 월전이 미술대학장 시켜달라고 맡긴 이력서라고 말했다면서“ 하고 언성을 높였다.

소전은 그제서야 감이 잡히는지 아무개 이름을 들먹이며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그 쪽에서 흥분해 야단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미술대학장 운동설의 음모의 정체는 드러났지만, 이번에는 그 연극을 꾸미다 들통이 난 장본인이 뻔뻔스럽게도 학교에 와서 적반하장 격으로 내가 “자신이 여학생을 농락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덤볐다. 이 패륜아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다. 지금 생각하면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창피해서 얼굴도 들기 힘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해를 넘긴 어느 날 그 자가 미대 동문인 제 친구 장 모군과 둘이서 나의 사무실에 사과하러 왔지만 나는 별 말 없이 대했다. 그것도 소전이 중간역할을 한 것인데, 당사자가 오기에 앞서 소전이 먼저 와서 나에게 그 자가 오거든 관대하게 용서하라고 간청했었다. 소전은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사이지만 재승덕박(才勝德薄)한 그의 처신은 이해하기 힘든 데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 한 사람의 간악한 흉계가 상사와 친구사이를 갈라놓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빚었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기에 회한과 자조의 뜻으로 사실대로 적어보았다. 이제 “지나간 일들은 모두 즐거워만 지는 것”이라는 푸쉬킨의 시나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