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혁명 때 나는 서울대 미술대학 학생과장을 맡고 있었다. 미술대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대학처럼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다. 격렬한 데모를 하던 고순자(高順子)라는 여학생이 희생되어 나는 대학을 대표해 박갑성 교무과장과 함께 조문을 다녀왔다. 데모가 절정에 이르러 수습 불가능상태에 이르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사회질서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치적인 문제가 풀리자 학생들은 학내문제를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이 학장을 연금하고 학장실에서 연좌데모를 벌렸다. “학장, 교무과장 물러나라”고 외치면서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이 방안 가득 버티고 앉아 있어 장발 학장은 점심도 굶고 변소 출입도 못했다. 학생들은 언성을 높여 당장 사표를 쓰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나는 학생과장으로 이런 사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본부학생처장인 윤태림(尹泰林) 씨와 연락을 취하면서 학생들에게 선후책을 의논하겠다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장 학장과 단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장 학장에게 사표를 쓰더라도 학생들 앞에서는 쓸 수 없는 일이니 본부에 가서 쓰겠다고 말하고 학장실을 빠져나가 집으로 가 있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장 학장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 제안대로 할 것을 결심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장 학장에게 내 연락이 있을 때까지 학교에는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내가 앞장을 섰다.
학생들이 학장을 에워싸고 못 가게 길을 막았다. 당장 사표를 쓰라는 것이다. 이때 학생들은 반대ㆍ지지, 두 패로 갈려있었다. 즉 임종식(역도선수)를 중심으로 한 학장 반대파와 정태진(태권도 선수)을 중심으로 한 학장 지지파가 그것이다. 장 학장은 학생들에게 본부에 간다고 말하고 학교를 떠났다. 학생들도 “와”하고 장 학장을 따라가다가 되돌아와서 계속 학장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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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 당시 교문을 박차고 시위현장으로 향하는 서울대 문리대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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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학교를 떠나지 않아 교수들도 그들과 함께 밤을 새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니 학장, 교무과장 퇴진과 함께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달라는 것이 요구조건이었다. 특히 미학과 학생들은 미술대학 졸업장을 받는 것보다는 문리대학 졸업장을 받기를 원하고 있는 듯 했다.
학생들의 속셈을 간파한 나는 장발 학장과 의논,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자”고 제안하면서 미학과의 박갑성, 박의현 교수도 함께 문리대로 보내면 구제도 될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때 박갑성 씨는 문제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장발 학장도 찬동, 간단한 교수회의를 거쳐 미학과를 문리래대로 보낸다는 공고문을 게시판에 내붙이고 학장 및 교수들도 일단 전원이 사표를 쓰기로 결의했다.
게시판을 본 학생들은 뜻밖이라는 듯 수군거렸다. 그러나 학생들의 데모는 계속되었는데 요구조건 관철을 위한 배수진 같은 것이었다. 사태를 수습할 수 없고 교권(敎權)도 유지할 수 없으니 전원 사퇴하자고 다시 제의, 마침내 교수 전원이 사표를 써서 큰 서류봉투에 넣어서 학장에게 전달했다. 학장도 집에서 써가지고 온 사표를 봉투에 넣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서무과 직원들과 운전기사, 사환까지도 모두 사표를 써가지고 왔다.
교수들은 학장을 앞세우고 일렬로 늘어서서 대학본부로 향했다. 법대 앞을 지나 구름다리를 넘어 대학본부로 가는데 학생들이 교수들을 가로 막았다. 우리들은 “이제 학교를 그만두었으니 좋은 교수 만나서 공부를 잘하라”고 말했더니 우리를 계속 따라오며 학장과 교무과장을 반대하는데 왜 다른 교수까지 사표를 내느냐고 말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도저히 교수노릇 할 수 없다”고 따끔하게 말하는 교수도 있었다. ‘닭 쫒던 개 울 넘겨 보듯’ 멍하니 서 있던 학생들은 우리들이 일제히 대학본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밖에서 서성거리며 돌아가지 않았다.
교수들이 윤일선(尹日善) 총장실에 들어가 사표 봉투를 내놓았더니 윤 총장은 절대로 사표를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만류했다. 우리들은 총장실을 나와 도보로 원남동을 거쳐 중앙청으로 걸어갔다. 학생들은 중앙청까지 계속 따라왔다.
이병도(이병도) 문교부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더니 이 장관도 “이러면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사직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장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교수들은 묵묵히 발길을 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