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을 그만두고 관훈동에 화실을 낸 나는 미국에 가서 전시할 작품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영어 공부도 시작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출장지도를 받았다.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준 헤이먼 씨는 우리나라에 와서 국악(國樂)관계를 연구한 미국인으로 우리 이름으로 해의만(海義滿)이라 행세 했다. 그는 관훈동의 내 화실에 와서 친절하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회화 위주였지만 문법도 곁들여서 쉽고 재미있게 가르쳤다.
미국 전시작품 제작에 전념하고 있는데, 1962년 9월 8일 전북 정읍 군수(김윤철)네게서 편지(공문) 한 통을 받았다. ‘이충무공 영정제작에 관한 조회’란 제목의 글이었다.
‘정읍군 정주읍(井邑郡 井州邑)에 이충무공 사당을 신설하게 되어 영정제작 봉안 문제로 각 방면에 추심한 결과 귀하께서 차(此)에 대한 조예가 깊다하여 조회하오니 다음 사항을 참조하시어 제작 가능여부를 회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정은 좌상으로 규격은 4척(족자), 기타 척수는 신장에 대한 비례로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제작기간은 62년 11월 5일까지. 제작용품은 최고급품을 사용할 것이며, 제작비용은 5만 원 정도라고 명시하고 상기 각항의 제작조건이 부당할 경우에는 귀하의 의견을 첨가하여 회보하기 바란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를 받고도 일에 쫓겨 차일피일 회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9월 12일자)에는 정읍군 내무과장 임종범 씨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공문을 재차 보내왔다.
‘그리고 안 그리고 간에 가부 의사를 9월 16일까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는데, 공문이 15일에 도착, 시간이 촉박해서 부득이 정읍군청으로 전화를 걸어 내 뜻을 전달했다.
“나는 53년에 이미 아산 현충사에 충무공 영정을 봉안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충무공을 존경하고 있어 화료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나에게 맡겨주면 성의를 다 하겠다”고 통보했다.
내 전화를 받은 정읍군에서는 “고맙다”면서 “시일이 없으니 빨리 내려와서 현장(사당)을 보고 계약을 체결하자”고 다급하게 요청했다. 내 사정도 빠듯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며칠 후 정읍군청에 내려갔더니 벌써 군청 옆에 짓고 있는 사당건물이 완공단계여서 영정봉안 장소도 돌아보고 척수도 재어보았다. 아산 현충사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사당이 짜임새 있게 잘 건조되어 영정제작에 보람을 느꼈다. 정읍군이 충렬사를 짓는 것은 일찍이 이순신 장군이 정읍 현감(縣監)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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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읍 이충무공 사당인 충렬사, 효충문으로 오르는 길(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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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읍 이충무공 사당으로 충무공 영정이 봉안된 충렬사이다(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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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대로 영정제작 계약을 맺고 즉시 일에 착수했다. 지금은 5만원 이면 적은 돈이지만 그때는(62년) 꽤 큰돈이었다. 환에서 원으로 10분의 1로 줄인 화폐개혁 직후여서 웬만한 월급쟁이 1년 몫은 족히 되는 금액이다.
정읍군은 계약을 맺은 뒤 나에게 두 가지 부탁을 했다 하나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의 비문을 받아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대(祭臺) 대상(臺床) 설계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노산 댁에 전화를 걸어 정읍군이 요청한 비문제작 승낙을 받았다. 노산이 비문을 짓는데 필요한 사료(특히 정읍군과 관계된 것)를 보내달라고 해서 정읍군에 전화를 걸어 자료를 즉시 보내라고 통보했다.
그런데 10월 18일에 정읍군에서 느닷없이 전보가 날아왔다. 내용은 “대상 설계 급송 요망”이었다. 부랴부랴 대상설계를 해놓고 연락했더니 정읍군에서 직원 한 사람이 올라왔다. 노산이 부탁한 사료를 가지고 나에게 먼저 들러 저녁을 함께 하게 됐다. 화실에서 가까운 청진동 어느 추어탕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정읍군청 직원이 반주를 몇 잔 하더니 저간의 영정 주문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초 정읍군에서는 충무공 영정 제작을 의뢰할 때 이당 선생과 나에게 경쟁입찰식으로 똑같은 공문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문을 받은 이당 선생 측에서는 며칠 후 전주에 사는 친구인 서화가 유당 김희순(酉堂 金熙舜)을 보내와 “어느 모로 보나 이당 선생에게 5만원에 충무공 영정을 그려 달라는 것은 무례이니 10만원으로 올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읍군 측이 예산 관계로 증액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니까, 그러면 안 하는 것으로 하자며 파해버리고 갔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