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군 직원에게서 이당 선생에게도 영정제작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이당 선생 쪽에서 안 하겠다니까 내게 매달렸다 싶어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이미 계약을 체결하고 작품도 제작 중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은 처음부터 화료와 관계없이 내가 좋아서 응한 일이었기에 누구를 탓할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말로서 말이 많은 세상’이어서 엉뚱한 잡음이라도 일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정읍군에서는 봉안 예정일이 11월 5일이라고 뻔질나게 계속 전화가 걸려와 미국 전시작품을 제쳐놓고 영정 제작에만 매달려서 예정일에 작품을 끝마쳤다. 때마침 표구까지 완성되어 표구를 맡았던 상문당 주인 박봉환(朴鳳煥)과 함께 기차에 작품을 싣고 정읍에 내려갔다. 당일로 되돌아올 수 없어 정읍에서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는데, 표구사 박 씨가 모처럼 새골에 내려가니 홀가분한 기분이었던지, 나도 모르게 전화로 김제에 사는 동양화가 벽천 나상목(碧川 羅相沐)을 불러냈던 모양이다.
목포행 기차가 이리역에 멎었을 때 뜻밖에 벽천이 낮선 친구와 함께 차에 올라왔다. 수인사를 해보니 벽천과 동행한 사람은 전주에서 표구사를 경영하고 잇는 임종석(林宗錫)이었다. 임 씨는 표구 일로 벽천 집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정주역에 내려 이충무공 영정을 정주군청에 인계하고 나서 여관부터 잡았다. 모처럼 벽천도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싶어서였다.
나, 박봉환, 벽천, 임 씨, 네 사람이 여관에 들어 환담하고 있는데, 정읍군 담당과장이 찾아왔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저녁 대접을 하겠다”면서 우리 일행을 어느 조용한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반주로 마신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과장이 ”이 자리에 화가 양반이 두 분 계신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험담 같지만 한 마디 해야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도청의 소환을 받고 들어가 봤더니 도지사가 대뜸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느냐“고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었다. “이당과 월전은 사제지간이라는데, 그래 선생이 그리는 게 좋겠느냐, 제자가 그리는 게 좋겠느냐”고 힐문하면서 ”당장 월전을 취소하고 이당에게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과장이 어처구니없어 도지사 앞에 서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했더니, 김인(金仁) 지사도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말했다.
과장이 말한 자초지종인즉, ”이당, 월전에게 똑같은 공문을 보내 충무공 영정 제작을 의뢰했는데, 이당 쪽에서는 전주에 사는 친구 김희순이 직접 내려와 돈이 적어 못 그리겠다고 파(破)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월전에게 부탁했는데, 월전이 제작에 착수하고 있을 때 전주의 그 분이 다시 찾아와 5만원에라도 하겠다고 해서 이미 계약을 체결했으니 안 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나중에 다시 사람을 보내서 5만원도 받지 않고 무료로 하겠다고 해서 아무리 공짜로 해준다고 해도 정읍군으로서는 일의 경위 상 번복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는 내용이었다. 과장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도지사는 “그렇다면 정읍군에 잘못이 없군”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또 지방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여 군수에게 압력이 들어왔다”고 몹시 흥분해서 얘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선 화가로서 낮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또 엉뚱한 구설수에 휘말릴까 걱정이었다.
전주에서 온 임종석도 “전주에서는 이당 선생이 그릴 것을 월정이 빼앗아 한다“고 소문이 나 있다고 말하면서, 전주에 돌아가면 잘못 전해진 풍문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말하며 억울한 월전 선생의 누명은 당장 벗겨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종전부터 미술계에 이러한 저속한 행태는 계속되어 식자의 빈축을 사왔다. 창피한 이야기다.
얼마 후 정읍군에서 충렬사 이충무공 영정을 봉안한다고 작가 참석을 요청해왔지만 나는 미국 갈 준비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훗날 풍편(風便)에 이당 선생이 충무공 영정을 그려가지고 정읍군에 내려가 기증했다고도 하고, 받아 주지 않아 아산 현충사에 가지고 가서 충무공의 종손 이응열 씨에게 주어 을둘목 사당에 봉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금 그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