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울대 미술대학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익대학에서 출강을 의뢰해왔다. 그때 홍대 미술대학장은 나와 서울대 미술대학에 함께 있었던 수화(김환기)였는데, 그가 서양화가 이봉상(李鳳商)을 보내 출강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나는 다른 일도 있고 화실 일도 복잡해서 짬이 없다고 사양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수화가 직접 찾아와서 내 손을 잡고 “나 좀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부득이 이번에는 내가 수화에게 통사정 했다. 내가 멀지 않은 날에 미국 갈 예정으로 있는데, 출강해서 무엇하느냐고 털어놓았더니 수화는 며칠이라도 좋으니 나와 달라고 강권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시한부로 학교에 나갔다.
나갔더니 학장실에 마침 청전(이상범) 선생이 나와 있다가 크게 환영했고, 다른 교수들도 진심으로 반겨줘서 고마웠다. 홍대에 출강한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1963년 7월). 떠나기에 앞서 학생들에게 미국에 가게 되어서 섭섭하게 되었다는 인사를 했더니 그들도 얼마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던지 다과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송계일(宋桂一)군이 주동, 교실에서 벌인 다과회는 퍽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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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화 김환기 [사진출처 : 임응식아카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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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에 가면서 화실과 집기 일체를 박노수와 박세원(朴世元)에게 물려주었다. 이들에게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까지 인계해주었는데,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제당(배렴)이 넘겨받았다고 한다.
3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끝내고 66년에 귀국해서도 홍대와 재차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귀국 후 한국일보사 뒤 수송동 117번지에 한옥 2층을 빌려 화실로 썼는데, 친지들을 초대해 집알이 하는 날 이대원(李大源) 씨가 와서 홍대 출강을 교섭했다.
얼마동안 시간강사로 나가다 홍대 재단이사장 이도영(李道榮) 씨의 특별부탁으로 68년부터 전임이 되었고, 나중에는 미술학부장까지 맡아 본격적으로 학교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홍대에 있을 동안 나는 조복순(曺福淳 동양화가) 임완규(林完圭 서양화가) 등과 가까이 지냈다. 조복순이 투망을 잘해서 늘봄공원 근처 냇가에 나가 천렵도 했다. 산기슭에 솥을 걸고 밥도 짓고 투망으로 잡은 민물고기를 끓여 매운탕을 만들고 막걸리를 곁들여 그럴 듯한 야유회를 했다. 그 후 불행히도 조복순 씨는 타계했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한토막이다.
70년인가 당국에서 교수들은 출근해서 퇴근까지 학교에만 붙어 있어야 한다는 새 근무 규정이 나와 여유 시간에 다른 일도 봐야 하는 나는 부득이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근무 규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내 시간 사정이 그럴 수가 없어서 사표를 낸 것이다. 그랬더니 조복순 씨가 사표를 들고 와서 다시 나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끝내 나가지 않고 오랜 교직생활을 끝냈다.
내가 미국에 가고 없는 사이 제당이 홍대에 출강, 파문을 일으켰다. 홍대는 2학년 담임에 천경자, 3학년 담임 운보(김기창), 4학년 담임을 청전이 맡다가 운보가 수도여사대로 옯겨 감에 따라 제당이 홍대로 오고 청전은 명예교수가 되었다. 서울대 강사에서 홍대로 적을 옮긴 제당이 홍대의 터줏대감 격인 천경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불화가 67년 16회 <국전>에서 터졌다. 당시만 해도 국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제당이 채색화를 푸대접한 것이다. 그 결과로 천경자가 지도한 홍익대에서 나간 채색화 22점과 운보가 가르친 수도여사대 쪽 채색화 15점이 무더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서로의 견해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일부 심사위원이 자기류의 그림을 내세우고 제자를 키우려던 편파적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선자들은 국전이 열리고 있는 기간 중인 10월 12일부터 22일까지 덕수궁 중화문(中和門) 옆 건물에서 ’제16회 국전 동양화부 낙선작품전‘을 열었다. 이영수, 이경수, 심경자, 이석구, 김영동, 김준자, 박애자, 서흥원, 유소정, 이영자, 이신우, 신은숙, 최은길, 최승태, 강신자, 이종진, 이화자, 박상순, 유영렬, 양세자, 김화연, 노준보, 황영자, 홍영선, 이승은 등 낙선자 전시회에 출품한 25명은 대통령에게도 청원서를 냈다.
이당(김은호), 소정(변관식) 등은 전시작품을 돌아보고 차까지 사주면서 낙선 작가들을 격려했다. 당시 TBC는 모닝쇼란 프로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TV프로에는 소정과 이영수, 이경수가 출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