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7월에 나는 미국과 유럽의 현대미술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미국으로 떠났다. 형편 가능한대로 그곳에서 전시회를 갖기 위해 40여점의 작품을 만들어 배편으로 부치고 비행기를 탔다. 해외전이니만치 10호 안팎의 소품이 대부분이고 3절, 반절짜리, 8곡병풍, 가리개, 족자 등이 주류였다.
지금은 여행자유화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초청장이 있어야 외국에 나갈 수 있었다. 그때 나에게 초청장을 보내준 사람은 당시 주미한국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이범석(李範錫) 씨다. 이 씨 부인 이정숙(李貞淑) 여사가 나에게 그림공부를 한 오환회(五環會)회원이어서 그와는 친숙한 사이였다. 초청장을 첨부, 정부여권을 내고 미국비자를 받을 때도 주한미국대사관 루이스 참사관이 도와줘 수월하게 처리 되었다. 루이스 부인도 오환회원으로 나에게 배우고 있는 처지여서 부인의 스승이라고 자연스레 도와준 것 같다.
김포를 떠난 비행기가 일본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해서 고장을 수리하느라고 장시간 머무는 바람에 모든 스케줄이 뒤죽박죽 돼버렸다. 미리 워싱턴에 연락해 공항출영을 약속받았으나 내려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두 시간도 아니고 다섯 시간이나 늦었으니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워싱턴 공항에 내리니 아는 사람이라고 한 사람도 없고, 대사관 전화번호도 모르고 전화 거는 방법도 몰라 당황하고 있다가 구내매점 주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냉정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이는데 뜻밖에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한 젊은 군인(미국인)이 도와줘서 우리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하여 공항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대사관에 도착, 이범석 참사관 집주소를 알아가지고 일단 그 집에 들어갔다.
워싱턴의 7월은 몹시 더웠다. 며칠 동안 이 씨 집에서 신세를 지고 아파트를 세 내어 들어가니 독신자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 혼자 지내기에는 불편이 없었다. 이리하여 나의 고독한 외국생활은 시작되었다.
내가 정작하자 워싱턴에 살고 있는 오환회 회원들이 이 여사(이범석 부인)의 연락을 받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하던 공부를 계속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청으로 서울에서처럼 레슨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많은 친구들이 덩달아 모여들어 분주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이범석 씨가 퇴근 길에 나의 아파트에 들러 이런 말을 했다. 오늘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시험 삼아 어떤 화랑에 들러서 한국의 유명한 동양화가가 작품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한 번 만나볼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 화방 주인의 말이 그동안 숫한 자칭 유명 화가들이 다녀갔지만 별로 신통한 작가를 보지 못했다면서 흥미를 느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앞일을 걱정하는 이 씨는 시험 삼아 한 번 가보자고 부추겼다. 내 생각에도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화상(畵商)과 만나보는 일이라 흥미가 있어 가보기로 마음먹고 다음 날 이 씨와 함께 작품 몇 점을 가지고 그 화랑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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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범석(1922.-1983.) 외교관, 주미대삭관 참사관, 인도 대사, 통일원장관, 외무부장관을 지냈으며 아웅산테러사건으로 순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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