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시내 가장 번화한 중심지에 위치한 그 화랑은 그리 크지 않고 또 훌륭해 보이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살펴보니 사면 벽에 그림들이 겹겹으로 걸려있고 방 한편의 안락의자에 50대로 보이는 주인인 듯한 남자가 뒤로 기대어 앉아 무슨 서류 같은 것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목이 짧고 뚱뚱한 몸집에 안경을 낀 인상이 매우 거만해보였다.
우리가 인기척을 하고 온 뜻을 말했는데도, 점원인 듯한 젊은 친구만 겨우 아는 체를 할 뿐, 그 주인 격의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앉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한동안 제 할 일만 하고 있는데, 그 태도가 매우 거슬렸다.
그때 이 씨가 가지고 온 작품의 포장을 뜯으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멈추게 하고 이 씨에게 “주인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저렇게 거만할 바에야 어디 작품인들 친절하게 평가해주겠는가? 우리가 잘못 온 것 같으니 차라리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인종차별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이 씨는 미국인의 생리를 잘 알고 대인관계에 능숙한 외교관이라 나의 성급한 분노를 달래며 작품들을 잘 보이는 곳에 늘어놓았다. 이윽고 그 주인이 보고 있던 서류를 서서히 접어서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에 기댄 채 대수롭지 않은 동작으로 앞에 놓인 내 작품들을 건네다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앞으로 당기면서 흥미 있는 듯한 시선으로 작품과 우리를 번갈아보면서 친절한 말씨로 의자를 권했다. 그러면서 작품이 모두 얼마나 있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이때 나는 마음속의 불쾌감이 가시지 않아서 속으로 ‘이제 네가 항복을 하는구나’ 하는 승리감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주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자기 화랑에서 전람회도 열어주고 작품도 팔아줄 수 있으며 단골 고객에게 초대장 내는 것과 신문, 라디오, TV 등에 선전하는 것은 물론 초대일에 칵테일파티도 베풀어 주겠으니 정식계약을 맺자고 수다스러울 정도로 호의를 보였다. 나는 이 친구가 단단히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우리 쪽이 튕기는 기분이 되어 계약조건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주인은 인쇄된 계약용지를 꺼내 놓으며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나로서는 모두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즉 첫째, 계약을 맺은 후에는 다른 화랑에서는 전시회를 하면 안 될 뿐 아니라 일체 작품 거래를 해서도 안 되고 둘째, 팔리는 작품에 대해서는 작품 대금을 4:6제로 분배할 것 등이었다. 나는 애당초 시험 삼아 가본 터라 도대체가 모두 뜻밖이었을 뿐 아니라 이 씨나 나나 그곳 화상들의 관행이나 풍습에 대해서 백지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앞으로 나의 계획은 워싱턴에서분만 아니라 뉴욕, 보스턴 등 미국의 주요도시와 유럽까지도 작품전시를 할 예정이어서 한 화랑에 발이 묶일 수는 없는 형편이라 그 제의를 즉석에서 거절하고 돌아왔다. 그 후 화랑에서는 몇 번이나 우리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이 씨에게 계약을 성립시키자고 졸라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화랑은 <갤러리 휘셔>로 워싱턴에서 가장 유명한 화랑이어서 미국 화단의 저명한 현역 화가들의 단골임은 물론 유럽의 거장 마티스, 피카소, 루오 등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취급하는 호상(豪商)으로 3대 째 워싱턴의 듀퐁 서클 중심가에서 화랑을 경영하는 유태계의 부자인 동시에 그 자신 일찍이 조각을 전공한 바 있는 예술상인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귀국을 앞두고 나의 필요에 의해 다시 그 화랑을 찾아갔다.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그곳 화랑들의 생리나 관습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나름대로의 계산을 가지고 그 화랑문을 두드렸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새삼 용건을 설명하기가 쑥스러웠지만 꾹 참고 여전히 거만한 듯한 그 주인에게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당신이 한국인 화가 아니냐고 말하면서 3년 전과는 달리 의자를 권하면서 친절하게 대했다.
그동안 나의 <국무성 초대전>과 <가톨릭대 전시> 등 몇 차례 개인전과 뉴욕에서 열렸던 <국제전> 등 나의 작품 활동을 무도 지켜보았노라고 말하면서 이번에는 자기네 화랑과 인연을 맺을 생각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먼저 번 거절당했던 불쾌감 같은 것은 추호도 없이 혼연히 대해줘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사무적인 상담을 끝마쳤다.
그리하여 1966년 8월 몹시 무덥던 어느 날 마침내 그 화랑에서 재미(在美) 3년간의 결산이라고도 할 작품전 테이프를 끊었다. 그 유태인 화상이 계산했던 만큼의 성과도 거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