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이 되면 가끔 만나 국내의 소란한 정황 등을 이야기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저녁에 나에게 들러 대포 한잔 하러 가자고 했다. 미국에도 대포집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덮어놓고 가자고 했다. 가보니 독일맥주를 파는 서울의 포장마차 비슷한 집인데 분위기가 아주 재미있어 맥주 대표를 여러 잔 했다.
또 한 번은 집에 만두를 만들어 놓았으니 함께 들자며 차로 데리f러 와서 저녁시간에 폐를 끼치기도 했다. 내가 귀국한 얼마 후에 그도 서울에 들어와서 문공부 장관에 취임했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워싱턴에서와 같은 재미있는 시간을 가질 겨를이 없어 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말았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그의, 간곡한 우정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항상 죄스럽게 생각한다.
박동선 씨는 워싱턴 중심가의 큰 저택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미국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성정했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밝고 영어실력도 뛰어날 뿐 아니라 사교에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어 워싱턴의 상류 사교계의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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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뛰어난 사교력으로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 기업가들과 폭넓은 교유를 했던 박동선 씨는 로비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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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는데 그가 미술에도 취미가 있고 내 그림을 좋아해서 수집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와 집에서 열리는 귀빈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넓은 홀에 내빈이 가득한데 전부 미국인이고 한국 사람은 나와 다른 한 사람뿐이었다. 많은 내빈들에게 나를 소개하는데 인사를 해보니 대부분이 미국 국회의 상원의원들과 저명한 기업가들이었다. 그때 박 씨는 30대 청년인데 어떻게 이런 교제를 할 수 있었는가 해서 나는 내심 놀랐다. 나는 그곳에 <동양예술학교>를 만들 때 나의 요청으로 재단이사가 돼주기도 했다. 미륭상사 고 박건석 씨의 아우이다.
내가 단신으로 미국 땅에 가서 한참 향수에 시달릴 무렵, 뜻밖에 반가운 편지를 받았다. 서울에 있는 줄로 알고 가끔 홍대 학장실에 앉아 있는 수화(김환기)를 그려보곤 했는데, 그 수화가 뉴욕에 와서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사연인즉 내가 홍대 강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자신도 홍대 학장직을 내놓고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그 여권을 가지고 곧바로 뉴욕으로 왔다면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 다음날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뉴욕으로 달려갔다. 찾아가보니 뉴욕의 업타운 빈민가의 낡은 목조건물 2층 협소한 방에 앉아 있었다. 집 앞 구멍가게에서 캔맥주 여섯 통 짜리 두 개와 땅콩 한 봉지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술을 마시며 불안정한 우리의 처지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캄캄한 심정으로 서로를 위로 했다.
그 후에도 수화가 워싱턴에 오면 나를 찾고, 내가 뉴욕에 가면 수화를 찾았다. 뉴욕의 현대미술관과 구켄하임 그리고 메디슨 에비뉴의 화랑가고 같이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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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워싱턴 체제 중에 만난 양유찬 순회대사 / 필자가 양 대사에게 한국화로 그린 성모상을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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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에 체류한 시간이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나의 행동반경이 좁았던 때문이겠지만 나는 미국 미술계의 사정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가르치는 일이었고, 시간의, 제약과 개미 쳇바퀴 도는 식의 일상의 반복 속에서 3년이란 세월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허허바다 같은 나라,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어떤 것인지, 예술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치수도 워싱턴은 조용하고 차분하면서 싸늘한 분위기이고, 경제의 심장부 뉴욕은 살벌하고 지저분하고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요지경 속 같았다.
요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토양 위에 엄격한 의미의 문화나 순수예술은 성장하기 어렵지 않을까? 뉴욕 마천루(摩天樓)의 위용, 타임스퀘어의 현란한 새벽풍경을 보면서 세계 최첨단을 실감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사회의 존엄성과 진실과 덕성을 찾아볼 길은 없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