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에 간지 3년 3개월만인 1966년 10월에 돌아왔다. 성북구 삼선동 4가 45번지에 있는 우리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15년 동안을 살던 혜화동 서울대 관사를 내놓고 장만한 내 집이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객지에 나간 뒤 학교 측에서 명도를 재촉하다가 미처 이사하지 못하고 있는데 집달리의 난폭한 행위로 쫓겨나 입주한 집이다. 나는 현관에 들어서면서 그동안의 아내의 노고와 가족들의 수난을 생각하며 무능한 나 자신을 자탄하는 마음뿐이었다.
며칠 휴식을 취한 뒤 나는 움직여야겠다고 생각, 한국일보사 뒤편 수송동에 화실을 마련했다. 가정집 2층인데 넓은 방이 두 개 있고, 복도가 있어 내가 쓰기에는 충분했다. 필요한 집기를 마련한 다음 오래 그리웠던 친지들도 만날 겸 간단한 피로연을 마련하고 초대장을 냈다. 이때 가깝게 지내던 화우들, 제자들은 물론이고 문화계, 언론계 등 각계의 유지들이 많이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설픈 객지생활에서 고국의 따뜻한 품에 안기니 나의 심신 모두가 활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나는 서서히 작품제작에 착수했다. 이때 홍익대학에서 출강 교섭이 있어 다시 강의를 나갔지만, 화실로 모여드는 수학 희망자들이 많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럭저럭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미국에서 제작한 8점과 귀국해서 제작한 작품 27점으로 67년 4월에 신세계미술관에서 귀국전을 열었다. 오랜만의 전시회라서 관람자가 많았고, 비교적 호황이어서 마음이 흡족했다.
더하여 이 전시회를 계기로 몇 사람의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어 지금까지 일정한 테두리 안에 맴돌던 내 생활에 전기(轉機)를 가져온 것은 나로서는 참 다행한 일이다. 전시가 계속되는 중에 뜻밖에 저명한 기업인 몇 분이 작품관람을 위해서 전시장을 찾았다. 원래 비사교적인 나는 이 분들에게 초청장도 내지 못했었다.
이를 계기로 후일 절친한 친구가 되고 내 생활의 또 다른 국면을 열어준 몇 분을 소개하면 대한교육보험의 신용호(愼鏞虎), 현대건설 이내흔(李來欣) 사장, 신용남(愼鏞男) 전 국회의원, 이회림(李會林) 동양화학 회장, 정진숙(鄭鎭肅) 을유문화사 회장, 신창호(申昌浩) 유피에이 회장 등이다. 이 분들은 초면인데도 허물없이 대해주어서 모두 막역한 친구가 되어 만년까지 같이 즐기며 살고 있다.
신용호 씨는 회사 교육보험이 한참 성장 발전을 하고 있을 때인데, 충무로 입구에 있는 사옥으로 나를 초대해 가보았더니 잘 정돈된 회장실에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문화재급 골동품이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심전(안중식)의 대형 ‘노안도’가 걸려 있어 방 분위기가 매우 우아했다. 회장실 옆의 작은 방에는 간단한 바 같은 것이 있고, 상 위에는 고급 양주 몇 병과 마른안주가 놓여 있었다.
신 회장은 이런저런 대화 끝에 내 작품을 본 소감과 미술에 관한 자신의 견해, 그리고 동양의 풍류와 멋에 대해서 농담 석어 이야기 하는데, 나는 그의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에 놀랐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야말로 일면여구(一面如舊)의 무간한 친구가 되었고, 그때의 우리는 기력 왕성한 중년이어서 자주 술자리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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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용호(1917-2003) 대한교육보험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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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신 회장은 나에게 예술가들은 화실에만 갇혀 살기 때문에 운동이 부족할 터이니 골프를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그의 말대로 운동이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살아온 나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그 당시 신 회장은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주관하는 골프클럽 수요회(水曜會)의 주요 멤버로 한 주에 수요일, 일요일 이틀을 빠짐없이 나가는 중이었고, 골프 실력도 상당한 수중이었다.
골프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몇 달 뒤 어느 날 신 회장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자기 차를 타고 골프장 구경을 가자고 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자기가 며칠 전 안양골프장에 나갔다가 호암(이병철)과 만나 내 이야기를 했더니 호암이 아직 안면은 없지만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제에 우선 골프장 구경이라도 해보라고 간곡히 권했다. 그래서 며칠 후 신 회장과 같이 골프장 구경을 갔다. 난생 처음 골프장에 들어서니 우선 시원스럽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이병철 회장은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이 회장은 일찍부터 문화재 수집가로 용인에 호암미술관을 세웠고, 이당 선생의 그림과 일중(김충현)의 글씨를 좋아해서 예술인들과는 인연이 많기 때문이었는지, 나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였다. 신 회장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은 운동이 부족하기 쉬우니 골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안양골프장에 나와서 자기와 같이 즐기자고 말했다. 나는 아직 백지상태라고 말하니 자신이 골프장에 소속되어 있는 프로에게 지시할테니 몇 번 나와서 레슨을 받으라고 권했다.
나는 이렇게 주변의 좋은 친지들의 각별한 호의로 골프입문을 하게 됐다. 내가 서교동에 살 때인데, 마침 가까운 거리에 서교골프장이란 인도어가 있어 나는 이른 아침에 그곳에 가서 프로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연습했고, 약 3개월 간 계속하고 나니, 그립 잡는 법과 스윙하는 자세는 대충 터득하게 되었다. 이때 이내흔 사장은 초보인 나에게 최신형 골프채 한 세트를 기증해서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