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돌아온 지 3년만인 1970년에 대한민국 예술원(大韓民國 藝術院) 회원이 되었다. 그동안 예술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장이었던 고희동 씨가 작고했고, 장발 회원도 미국으로 떠났으며 투병 중에 있는 회원도 여럿 있었다. 내가 회원이 된 당시의 회장은 박종화(朴鍾和) 씨였다. 박 회장은 문학분과 회원이고 소설가인데 문학의 소양도 깊었고 포용력이 있어 회원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고 민간이고 예술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예술원 청사 하나 없이 이곳저곳 셋방살이 신세였다. 중앙청 구내 뒤편에 있는 옛날 건물에 곁방살이도 했고 조달청 건물에 어렵사리 기대기도 했다. 소속도 대통령 직속기관이어야 할 것이 문공부 산하기관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선진국의 경우 프랑스 아카데미는 국가최고의 권위기관이며 아카데미 멤버는 정부 각료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 후 정부가 예술원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시책을 펴기도 햇으나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
나는 70년 초부터 많은 일을 했고 이런저런 분주한 나날이었다. 수송동에 있던 화실을 관훈동으로 옯겼고 새 화실에서 행주산성에 봉안한 권율(權慄) 장군 영정을 제작했으며, 마포구 서교동에 주택을 신축 이사했다. 홍익대학교에서도 다시 요청이 있어서 미술학부장으로 취임했다.
여의도에 신축 중인 국회의사당 건설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일 무렵 국회 사무총장 선우종원(鮮于宗源) 씨가 의사당 벽화 제작을 의뢰해왔다. 막중한 국사를 다루는 민족적 신성의 전당이고 웅대한 규모의 새 건물이 탄생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긴장했다. 한번 최대의 역량을 발휘하여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역작을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우선 건축현장을 보여 달라고 요청을 했다. 선우 총장의 안내로 벽화가 걸릴 장소와 주변의 공간 사정 등을 살펴보니 우선 그림이 걸릴 벽면이 가로는 길고 세로는 짧아서 작품 주제 선택에 제약이 있을 것 같았다.
선우 총장에게 국회 측에서는 어떤 내용의 벽화를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작품 주제도 작가에게 일임할 테니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건물 내부를 둘러보는 중에 현 의사장과 꼭 같은 방이 또 하나 있어 왠 의사장이 둘이냐고 물어보았다. 선우 총장 대답이 이것은 후일 남북통일이 되면 양원제(兩院制)가 되고 그렇게 되면 이 방은 하원으로 쓸 예정이라고 발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아하!’ 과연 통일된 민족 전체의 의사당이 되면 벽화도 당연히 민족 전체를 상징하는 그림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화실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문득 민족의 성지 <백두산 천지도>가 가장 적당할 거라고 생각되어 다음 날 선우 총장에게 내 뜻을 전달했다. 국회 사무국은 나의 제안을 건설위원회에 상정했고 건설위원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찬성, 확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 주제 선정에는 만족했지만 막상 백두산 천지를 그리는데 필요한 기본 자료가 문제였다. 그때는 국내에 백두산 천지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다. 조선일보사가 일제 강점기 때 백두산 탐험대를 보냈을 때 취재기자들이 소형 카메라로 흑백사징을 찍어온 것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부분 촬영이어서 전모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중국과 국교도 없어 지금처럼 가볼 수도 없는 사정이어서 막상 백두산 천지를 그리겠다고 해 놓고 자료가 없어 난감했다.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깜짝 놀랄 정보가 들어왔다.
지면이 넓은 어떤 친구가 한국일보사의 장기영(張基榮) 사장을 만나 보라는 것이다. 장기영 씨는 남북회담 대표로 얼마 전에 평양을 다녀왔는데 그때 백두산 천지 사진을 가져온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한국일보사를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장 사장이 외국출장 중이어서 비서들에게 온 뜻을 말하고 사진이 있으면 좀 빌려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비서는 사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장 사장의 승낙 없이는 빌려줄 수 없을뿐더러 그 사진은 장 사장이 어렵게 입수한 사진이고 장 사장이 어떤 특별한 용도가 있어 절대 비장하고 있는 물건이어서 장 사장이 있더라도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 그 비서가 평소에 지면이 있는 사람이어서 내가 이 자료가 필요한 사정을 설명하고 재차 빌려달라고 요청했더니 그렇다면 빌려줄 수는 없고, 잠깐 보여줄 테니 참고하라고 하면서 조그만 액자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여주는데 선명한 원색으로 된 그 사진은 내가 찾고 있는 자료,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반가워서 빌려주지는 못하더라도 스케치 모사라도 해서 제작에 참고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였다.
다음날 스케치 북을 가지고 가면서 주머니 속에 카메라도 하나 넣고 갔다. 비서실 옆에 있는 부속실에서 모사를 해보니 윤곽은 파악이 되나 세세한 부분의 컬러는 잡히지 않아 가져온 카메라로 복사를 했다. 장 사장이 그토록 귀물로 생각하는 사진을 본인의 승낙 없이 복사하는 것이 죄스럽기도 했지만, 이게 어디 내 개인의 일인가 싶어 나중에 장 사장에게 양해를 구할 생각으로 이 자료를 토대로 제작에 착수했다.
가로 7미터 세로 2미터의 대작을 다루려니 넓은 장소가 필요해서 홍익대학에 사정해서 쓰지 않는 교실을 하나 빌렸다. 이번에는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문제였다. 이만치 큰 작품을 화선지를 조각보 모으듯 해서 쓸 수도 없고 화선지란 질이 약해서 이런 큰 작품은 할 수가 없고, 채색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태부족이어서 즉시 동경으로 날아갔다. 일본에는 대작용(大作用)으로 가로 세로 9척 크기의 소가죽[牛皮] 같이 질긴 마지(麻紙)라는 것이 있고, 채색도 천연(광물질) 불변색 등 자료가 풍부해서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이 벽화는 우리의 영원한 민의의 전당이고 백년 천년을 내다보는 구원(久遠)의 상징물인 만치 이 건물 안에 걸릴 벽화로 거기에 걸 맞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를 우리의 순지 닥종이로 세 번 배접하고 화판에 붙인 다음 아교와 백반을 혼합한 액체로 특수 가공하여 제작에 들어갔다.
수개월이 걸려 작품이 거의 완성될 무렵 일찍이 백두산 천지에 가본 적이 있는 친구 유달영(柳達永)과 사학자 유흥렬(柳洪烈) 씨를 초대, 작품을 평가해달라고 다행히 호평이었다. 이때 8월의 무더위가 심한데도 예술원 회장 박종화 씨와 미술계의 동료 여러분이 참관해주어서 감사했다. 여기서 하나 특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위기를 넘기고 투병 중에 있던 대한교육보험 회장 신용호 씨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목발을 짚은 채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 뜨거운 우정에 할 말을 잃고 한참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이 작품이 새 국회의사당 현장으로 옮겨져 걸리게 되었는데, 작품 면적이 넓어서 유리를 끼우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대형 유리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이 준공되지 내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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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두산 천지도> 1975. 700*200cm, 국회으,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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