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회에서 알게 된 소전 손재형(素荃 孫在馨)과는 그가 중환에 빠지기 전까지 자별하게 지냈다. 전공과 성격은 달랐지만 같이 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 탓에 남달리 친하게 지냈다. 소전은 서예뿐만 아니라 문인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서화골동수집에 취미가 있었고 재력도 있어 양정(養正)학교 재학시절부터 수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학생모자를 쓰고 광화문 비각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알아보고 골동 중개인들이 따라나섰다고 한다.
소전은 1902년 진도(珍島) 부자의 유복자로 태어나 할아버지 슬하에서 아들 겸 손자로 귀엽게 자랐다. 또한, 진도에서 목포를 왕래하는 배(船舶)와 목포에 있는 극장, 염전(鹽田) 등의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부유한 환경에서 일찍부터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 수집에 눈떠 국보급 서화 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소전은 연암 박지원(燕岩 朴趾源)의 필첩,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그림, 자하 신위(紫霞 申緯)의 유묵,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필적을 수집한 연유로 ‘연단자추지실(燕檀紫秋之室)’이라는 당호(堂號)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서화골동을 수집한 관계로 창랑 장택상(滄浪 張澤相),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 단우 이용문(丹宇 李容汶)과도 교유가 있었고,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와는 특히 절친했으며 조선미술관을 경영하던 오봉빈(吳鳳彬)과도 자주 만났다. 사군자를 잘 치고 서화골동 수집가로 상당한 이름이 있었던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과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다.
송은은 마지막 내관(內官)이어서 세도(勢道)도 하고 생활도 유족했다. 연지동에 소실을 두고 있었는데 나와 소전은 가끔 이 집에서 대접도 받고 수장품도 감상했다. 조선백자에 술을 담아내고 차돌박이 수육을 정갈하게 내놓는데 음식솜씨가 일품이었다.
소전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 이야기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귀양살이할 때 청나라를 열두 번이나 오가며 귀한 서책 등을 구해서 추사 선생 유배지로 보내준 문인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이 그림이 어떤 경로에선지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京城帝大) 교수로 있던 후지즈카(藤塚)의 수중에 들어갔다. 후지즈카 는 추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해방 1년 전에 한국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챙겨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소전이 이를 알고 후지즈카를 찾아 동경으로 갔다. 때는 2차 대전 말기였고 동경에 공습이 심해서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난리통에 소전은 후지즈카를 찾아가 부근 여관에 진을 치고, 노령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그를 매일같이 문안했다. 후지즈카가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 소전이 <세한도>를 넘겨받으려고 이미 여러 차례 그를 찾아갔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지칠 대로 지친 후지즈카는 소전을 앉혀 놓은 자리에 아들을 불렸다. “내가 죽거든 조선의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말고 <세한도>를 돌려주거라”
이 말을 듣고 소전은 일단 물러나왔지만, 정세가 긴박한 상황에서 그림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조석문안을 계속했다. 후지즈카도 소전의 정성에 감복했던지 “전화(戰禍)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온 성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냥 주는 것이니 부디 잘 모셔가라”고 하면서 그림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한도>를 찾아온 소전은 귀국하자마자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에게 달려갔따. 위창이 <세한도>를 펴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에 가서 우리 국보를 찾아왔다‘는 내용의 제발(題跋)을 썼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세한도>는 끝내 부득이한 사정으로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뿐만 아니라 6.25동란 때 무호 이한복의 미망인에게서 입수하여 지극히 아끼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도 끝내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타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소전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때 외도하지 말라며 그토록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