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가(家)와 우리 집은 오랜 세의(世誼)가 있다. 안동에 삼태사묘(三太師墓ㆍ안동 金氏, 張氏, 權氏 始祖墓) 가 있는데, 세 집안 자손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사당에는 삼태사 위패가 모셔있다.
내가 일중을 알기는 해방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전> 초기부터 그와 더욱 가까이 지냈다. 일중은 나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지만 주호(酒豪)여서 일화도 많다. 일중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해 순절한 증조부 오천 김석진(悟川 金奭鎭) 공, 한말(韓末)의 유명한 한학자인 조부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공, 고매한 선비였던 부친 번계 김윤동(樊溪 金潤東) 공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 씨 명문가의 2남으로 서울서 태어났다.
선비집안이고 문한가(文翰家)여서 일중뿐만 아니라 일중 5형제 모두 알고 지내는 터다. 문현(文顯), 충현(忠顯), 창현(彰顯), 응현(膺顯), 정현(政顯) 5형제가 모두 서문(書文)에 능하지만 문현 씨는 75년에 작고했고, 일중과 응현 씨는 이미 서예에 일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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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사진출처 ; 임응식아카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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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여고(彰文女高) 교장 창현 씨는 한문학(漢文學)의 대가이고 정현 씨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중에 나와 가까이 지냈다. 일중은 일제교육은 시키지 않겠다는 조부 김영한 공의 뜻에 따라 가학(家學)으로 <사서삼경>을 배우고 나서야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한문공부를 하면서 서예도 익히기 시작했는데, 한자 외에 궁체(宮體)글씨도 잘 쓴다. 일중은 중등학교 재학시절에 이미 전국의 서예 백일장을 석권해서 필명을 날렸다. 해(楷)ㆍ행(行)ㆍ전(篆)ㆍ예(隸)ㆍ초(草)ㆍ오체(五體)에 두루 능하지만, 행서(行書)ㆍ예서(隸書)에 특히 뛰어난 노력가. 49년 1회 <국전>부터 서예부 추천작가가 된 실력가이며 해방이 되자 맨 먼저 <글씨본>을 만들어 낸 서예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일중은 60년부터 73년까지 <국전> 심사위원으로 서예발전에 이바지했고, <우리 글씨 쓰는 법(1941), <배우고 본 받을 편지체(1947), <중학서예(19555)> <국한서예(1970), <일중 한글서예(1979)> 등의 책을 펴서 후진을 양성하고 서예의 바른 길을 일깨워주었다.
일중의 일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풍류와 술에 얽힌 일화가 으뜸일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마산의 유지로 한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한 학초 최재형(鶴初 崔載衡)의 초청으로 일중과 ‘주유천하(酒遊天下)’를 한 일이 있다.
학초는 예술을 좋아해서 서화가 친구가 많다. 특히 성재휴(豊谷 成在烋)와는 각별하게 지내는 사이다. 우리 일행 중에는 동산방(東山房) 주인 동산 박주환(東山 朴周煥)도 동행하여 주기(酒氣)투합한 여로가 되었다. 학초가 부산에서 소주 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먼저 부산으로 내려갔다. 우선 소주공장부터 구경하고 요정에 들어 시음(試飮)을 시작했다. 한잔 두잔 한 것이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일중이 허리끈을 풀고 흥을 돋구어 하룻밤을 호유(豪遊)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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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유천하 / 마산 학초(최재형)의 집에서 (우로부터 학초, 일중 필자, 박주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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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학초의 집이 있는 마산으로 갔다. 어느 틈에 연락했는지, 자택에서도 잔칫상처럼 큰 상을 차려 내놓아 여기서도 무던히 마셨다. 일중은 어느 때는 묵덕보살처럼 앉아 있지만 술만 들어가면 목소리도 걸걸해지고 이야기도 잘해 이 날도 술자리가 흥청거렸다. 연 이틀 밤샘. 술에도 학초는 물론 일중, 동산이 모두 쌩쌩해서 부러울 정도였다.
어지간히 마셨다싶었는데 학초가 진주로 가자고 서둘러서 또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진주시를 버려두고 곧장 진양호(晉陽湖)에 차를 댔다. 오른쪽 절벽 위에 있는 아시아호텔에 방을 잡아 놓고 진양호에 배를 띄웠다. 초여름 오후의 날씨도 좋았는데, 놀잇배 속에서는 학초가 마산서 싣고 온 10년 묵은 매실주로 다시 취흥을 돋구었다. 이 정도로는 만족치 않아 호숫가 언덕에 배를 대고 물가 주막에서 은어회를 안주로 동동주를 마셨다.
해가 넘어가자 호텔에 온 우리는 저녁밥을 청해놓고 또 술자리를 벌인 다음 호텔 위의 나이트클럽을 오르내리면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안에 맥주병이 그득했다. 술에 취해 어릿어릿했지만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남해대교까지 가서 생선횟집에서 해장술을 마셨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은 여러 번이지만 이번같이 쾌음(快飮), 호유(豪遊)한 것은 일중이나 나나 처음 있는 일이다. 일중은 역시 주호(酒豪)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