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허백련(毅齎 許百鍊) 선생은 1891년 전남 진도(全南 珍島)에서 태어났다. 의재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격찬을 받았던 조선시대 말엽의 서화가 소치 허유(小癡 許維)의 집안으로 소치는 의재의 종고조(從高祖)이다. 어려서는 마침 그가 자란 진도로 유배되어 온 당대의 대학자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 위당 정인보의 寸叔) 밑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림은 소치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의 영향이 크다. 미산은 의재의 예술을 탈바꿈시키는데 누구보다도 큰 힘이 된 사람이다. 의재의 초기 작품들이 삼원법(三遠法)으로 전개되고, 특히 삼각형으로 형성된 주산(主山)들이 우리나라 야산을 이루고 있는 점과 발묵(潑墨)의 침윤(浸潤)으로 운연(雲煙)의 분위기를 나타낸 것은 미산의 작품과 공통되는 점이다.
의재는 1911년 기호학교(畿湖학교, 중앙학교 전신)에 입학해서 공부하다가 1913년에 일본에 건너가 입명관(立命館)대학에 다녔다. 그가 법학공부를 하다가 미술공부로 돌아선 것은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와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권유 때문이라 한다. 그의 그림재주를 알아본 고하가 “자네는 그림을 그려야 제격”이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일본 남화(日本 南畵)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의 문하생이 되었다. 소정(변관식)보다 12년이나 먼저 고무로에게 사사한 남화(南畵)의 대선배다.
의재는 남들이 다 독창을 내세워 신남화(新南畵)계열로 나갈 때도 그만은 우리 고유의 남화법통(南畵法統)을 지켜 정신적ㆍ기술적인 면에서 단 한 발짝도 상궤를 벗어나지 않았다.
의재가 1922년 제1회 <선전>에서 1등이 없는 2등상을 받았을 때 심사위원으로 온 일본의 가와아이 교쿠도우[川合玉堂]가 그의 작품을 보고 “중국풍도 아니고, 일본풍도 아니고 순전히 한국 것이다”라고 한 말은 유명한 촌평이라 하겠다.
의재는 그림뿐 아니라 한학에 밝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무등산 허리에 15정보 가량의 땅을 일구어 <무등다원(無等茶園)>을 만든 것은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다원 옆에 <춘설헌(春雪軒)>이란 집을 짓고 여생을 거기서 보냈다. ‘춘설헌’이란 당호를 지은 것도 송시(宋詩)에 ‘一區春雪勝醍胡ㆍ한 사발 춘설이 제호탕(더위를 쫓는 한약)보다 낫다’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자기 다원에서 생산하는 차를 ‘춘설차(春雪茶)’라고 명명한 것도 바로 그의 멋에서 비롯된 바이다.
|
|
| ▲ 의재 허백련(1891-1977) (사진출처 : 임응식아카이브) |
|
어느 해던가 내가 <전남도전(全南道展)>의 심사위원으로 광주에 내려갔다가 소전(손재형)과 함께 춘설헌에 들른 일이 있다. 그때 마침 장마철이어서 비가 오락가락 했다. 전남도에서 차편을 마련해주어 춘설헌 밑까지 갔는데 개천의 물이 불어 징검다리가 넘쳐서 건널 수가 없었다. 춘설헌 밑 구멍가게 주인에게 광주 시내에서 사가지고 간 선물을 맡기면서 물이 빠지거든 의재 선생께 전해달라고 명함을 붙여 전했다. 그랬더니 젊은 가게 주인이 선뜻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면서 잠깐 계시면 전해드리고 오겠다며 바삐 뛰어갔다.
조금 있으니 의재의 제자 너댓 명이 쫓아 내려오면서 “그냥 가시면 안 된다고 모셔 오랬으니 제 등에 업히세요”하며 등을 내밀었다. 소전과 나는 그들의 등에 업혀 내를 건너 춘설헌에 닿았는데, 의재는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삼베 중의적삼에 지팡이를 짚고 집 앞에 나와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 좌정하니 제자들을 나오라고 불러서 “이 어른들을 뵈어라”고 하니 모두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의재가 직접 달여 내놓은 춘설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화단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때가 가까워 폐가 될까봐 일어섰다. 의재는 우리 손을 잡고 한사코 놓아주질 않았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손님을 그냥 보낼 수가 없다”면서 점심을 들고 가라고 만류했다.
얼마동안 앉아서 의재의 띄엄띄엄 하는 덕의(德意)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큼직한 교자상이 나왔다. 별안간 마련했을 텐데도 있는 반찬을 총동원했는지 교자상이 가득했다. 점심과 함께 반주도 한 주전자 내왔다. 그때 의재는 눈이 나빠 술을 마시지 못할 때였다. 그런데도 우리만 마실 수 없다고 권했더니, “오늘은 귀한 손님이 왔으니 특별히 한 잔 해야겠구만”하면서 잔을 받았다.
그날 우리는 은사(隱士)의 집 춘설헌에서 은어(銀魚)구이와 함께 마신 술자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술도 술이려니와 그윽한 분위기와 의재의 순후한 덕풍이 이날까지 나로 하여금 존경심을 더하게 하는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춘설헌을 나서는데 대나무 잎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