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술원 회원이 되던 70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엑스포70’이 열렸다. 문공부의 참관 권유도 있고, 바람도 쏘일 겸 서예가인 시암 배길기(時庵 裵吉基)와 함께 오사카에 갔었다.
나와 동행한 시암은 부산 피난시절부터 사귄 친구다. 고향은 경남 창원(昌原)이고 6.25동란 전까지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9.28수복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 서울에 왔다. 당시 문교부 차관이던 허장수 씨와 인척인 시암은 문교부 예술과장으로 재직하면서 53년 2회 <국전>때부터 추천작가로 활약했고, 60년 9회<국전>부터는 심사위원을 했으며 예술원 창설 당시에는 주무관청의 과장으로 활약, 57년 8월 초기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부산에서 알게 된 시암과 나는 서울에서도 친교가 이어졌다. 한편 소전에게 사사한 관계로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이런 시암과의 일본 여행은 재미있었다. 시암은 일본에 유학해서 일본말도 잘할 뿐 아니라 지리, 풍속 등을 잘 알고 있어 여행에 불편이 없었다.
여행 중에는 교포 사업가 박 모 씨의 초대로 전통 일본 요정에도 가보았다. 일본 고유의 의상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이른바 게이샤를 처음 대할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그날 밤 박 사장과 친분이 있는 한국일보 오사카 지국장 김충한(金忠漢) 씨도 동석해서 한층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김 지국장은 한국일보 장기영(張基榮) 사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여서 죽이 잘 맞았다.
오사카 박람회와 교토[京都], 나라[奈良] 등을 구경하고 신칸센[新幹線]으로 동경으로 가는데 그때 일본 전역이 ‘엑스로70’을 보러온 관광객으로 붐벼서 호텔사정이 좋지 않았다. 호텔 예약을 하지 않고 떠나 좀 불안했으나 다행히 신칸센에는 무선 전화가 설치되어 있어 동경으로 연락이 가능했다. 시암이 전 서울대생이고 동경에 사는 서양화가 이우환(李禹煥) 군에게 전화하여 호텔예약을 부탁했다. 이 군은 밤이 깊었는데도 동격역까지 나와 궁성(宮城) 옆에 있는 호텔까지 안내해주었다.
동경에서 박물관, 미술관 등을 돌아본 다음 하코네[箱根町] 관광도 할 생각으로 여행사에 부탁, 호텔을 예약해놓고 기차 편으로 하코네에 도착해서 예약한 호텔 가스라(桂)를 찾아갔다. 얼핏 보기에 호텔이랄 수도 없을 만큼 초라해보였다. 현관에서 방을 달라고 하니 안내양이 몇 사람이냐고 물었다. 두 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허술한 현관 옆 방올 안내했다. 호텔을 잘못 잡은 것 같아 실망하고 앉아 있는데, 한참 후에 여주인이 차를 내왔다. 우리들을 보더니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두 사람이라고 해서 남녀 한 쌍이 밀월여행을 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얼마 후 그 여주인이 숙박부를 가지고 와서 주소, 성명, 직업 등 여행자 신원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국적은 한국, 직업은 예술원 회원이라고 썼더니 주인이 놀라는 기색으로 “한국 분 입니까?” 하고 다져 묻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일본말이 유창해서 일본사람인줄 알았다며 “우리 호텔에 귀한 손님(예술원 회원)이 찾아 오셨다”고 말하면서 방을 바꾸어 주겠다고 앞장서 나갔다.
따라가 보니 호젓한 긴 복도를 거쳐 분위기가 전혀 다른 어느 아늑한 방의 후스마를 열고 들어서니 가장자리를 비단으로 꾸민 탄력 있는 노란 다다미가 눈을 끌었다. 아주 청결한 전형적인 일본방이었다. 뽀얀 흙벽에 비단결 같은 나무 기둥, 도코노마에는 후지산[富士山] 그림 족자가 단정하게 결려 있어 방의 분위기를 돋구었다.
얼마 후 여주인이 다시 저녁상을 들고 와 반주를 권하는데 은어(銀魚) 한 마리씩을 구워 파란 대잎(竹葉)위에 받쳐 내놓은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 호텔은 자연온천장이어서 목욕탕이 유명했다. 우리 방 바로 앞의 울창한 숲속에서는 밤새도록 폭포물 소리가 들려 나그네의 정감(情感)을 더해주었다.
떠나는 날은 5, 6명의 종업원이 현관밖에 일렬로 서서 우리를 전송하고 주인은 나무로 깎은 예쁜 인형을 선물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