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 내가 <전남도전(全南道展)> 심사위원으로 광주에 내려갔을 때 해남 대흥사(海南 大興寺)에 들렀다. 대흥사는 추사 김정희 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던 초의대사(草衣大師)가 있던 절이고, 또 추사의 유묵(遺墨)도 있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소전과 내가 대흥사에 간다니까 광주의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화백도 따라 나섰다. 아산은 어느 틈에 준비했는지, 몇 사람의 국악인까지 동원, 택시 두 대로 대흥사에 도착했다.
우리가 두륜산(頭輪山) 대흥사에 당도한 것은 저녁 때로, 개천가 여관에 여장을 풀고 그날 저녁에 풍악(風樂)을 잡혔다. 여관집 여주인도 한량이어서 재담과 노래를 잘했다. 국악인들이 왔다니까 그녀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 여관에는 마침 현당 김한영(玄堂 金漢永)이 체제 중이어서 우리 술자리에 같이 어울려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판소리를 들었다. 평상시엔 말수가 적은 아산도 흥이 나니까 고수(鼓手)를 멀어내고, 북채를 잡는데 숨은 가락이 흥을 돋구었다. 서화가 중엔 이렇듯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
후소회원이었던 운전(허민)은 한학에 밝아 <동의보감(東醫寶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번역한 사람이다. 이 사람도 숨은 한량이다. 왜정 때로 기억되는데, 가야금의 명인 기산 박헌봉(岐山 朴憲鳳)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일이 있다. 그런 그림을 기산이 내다 팔아 5백 원의 거액을 마련, 금강산 천일각(天一閣)에서 한 달 보름이나 유숙하면서 멋들어지게 놀았다.
선유(船遊)를 하다가 갑자기 기산을 부르더니 “좋은 벗과 더불어 이렇게 밝은 달밤에 흔쾌하게 취했으니,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잊고 이대로 저승에 가면 얼마나 좋겠나”하면서 영랑호(永郞湖)로 뛰어들려다 거문고를 타던 기산과 기녀(妓女)들이 달려들어 붙잡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운전은 여행벽이 있었다. 걸핏하면 화구를 메고 기산에게 거문고를 들려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풍류를 갖추느라고 기생들을, 동반하기도 했다. 보통 때도 술이라면 어깨춤을 추던 운전이 해방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그가 머무르고 있던 경남 사천군 비양면 다솔사(多率寺)에서 소전 변관식(小亭 卞寬植), 내고 박생광(乃古 朴生光),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 청남 오제봉(靑南 吳濟峰)과 함께 진주 시내에 나와 몇 차례를 마셨는지, 곤드레가 되어 개에 물린 이야기를 들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뭐니뭐니 해도 기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데 부인을 시켜 술상을 차려오게 했던 일, 그를 좋아하던 기녀가 북간도로 떠나면서 돈 5원을 내놓으며 “이 돈으로 술 사 잡수시고 제 생각해달라”고 한 일은 운전의 멋진 일화라 할 만하다.
서예가인 유당 정현복(惟堂 鄭鉉福)도 소문난 한량이다. 나와는 남달리 친하게 지냈고 그의 북 솜씨와 춤은 전문가들도 알아주는 터였다. 두주(斗酒)를 불사하던 주호(酒豪)였는데 술 때문에 병을 얻어 그 좋아하던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놀던 가락이 있어 누가 부추기면 “까짓 거 살면 몇백 년 산다고 그래 한잔 하지”하는 소탈한 성격이었다.
검여 유희강(檢如 柳熙綱)도 강직한 선비 서예가다. 중국에 여러 해 동안 머물면서 한학과 서법을 연구했다. 술이라면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던 그가 병으로 금주령(禁酒令)을 받았을 때 병상에 누워서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산담”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의 곧은 성품은 글씨에도 청경한 기품이 보여 진짜 선비다운 면모를 보였다. 검여는 입버릇처럼 황매천(黃梅泉)의 절의(節義)에 빛나는 선비정신을 치켜세웠다. 뇌일혈로 쓰러진 뒤에도 끈질긴 노력으로 좌수서(左手書)를 써 새로운 서예의 경지를 이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