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예술원장을 역임한 문단의 원로 월탄 박종화 선생과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 양반과는 여러 차례 술자리도 같이 했는데, 월탄은 기력이 좋을 때는 말술[斗酒]을 사양치 않던 주선(酒仙)이었다. 취기기 도도해지면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서 무릎을 탁탁 치며 연상 “격이 높지”를 찾던 분이다.
지훈 조동탁(芝薰 趙東卓)과 고무신에 술을 따라 마신 이야기며, 중국의 아무개는 술에 취하면 절간에 가서 선했다(醉中往往愛逃禪)는 고사(古事)는 월탄의 주석(酒席) 18담(談)이다.
지금은 없어진 충신동 댁으로 연초에 세배를 가면 으레 술상을 차려 내왔다. 서재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조수옹(釣水翁)>이란 편액(扁額)을 걸어놓고 당호(堂號)까지 ‘조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라 지어 추사의 글귀를 아꼈다. 귀한 손님이 찾아가면 자신이 애장한 병풍을 자랑했다. 이 때문에 월탄 댁에서 추사의 병풍을 본 사람이라야 진짜 손님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문갑 위에 백자 항아리를 놓아두고 그 속에 편지를 보관하던 조선시대 유풍이 몸에 밴 분이다. 이조의 멋을 한 몸에 지닌 최후의 문인이라 해도 과찬이 아닐 것이다.
월탄이 성균관대 교수로 있을 때 서울미대에서 요청, 일주일에 한두 번 씩 나와 미술대학 학생들에게 문학 강의를 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꼭 교수실에 들어 환담을 나누었다. 80년대에도 내 도불전(渡佛展) 서문을 써주어 귀국해서 인사 차 방문했더니, 퍽이나 반가워했고, 병환 중에도 깨끗한 한복을 입고 여상하게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서양화가로는 유경채 씨와 가끔 어울렸다. 그는 성격이 차분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다. 술을 좋아해서 술친구가 많았고 나와도 더러 술동무가 되었다. 신촌로터리 일대에는 유 교수의 구역이어서 단골집이 많다. 그의 이름만 대면 외상술도 마실 수 있을 정도다. 몇 년 전인가 팔당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오는 길에 영운 모윤숙(毛允淑) 여사가 맷돼지 고기 타령을 해서 유 교수가 맷돼지요리 잘 하는 집을 안다고 귀띔해 줬더니 영운이 언제 셋이 같이 한번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후 어느 날 예술원 회의를 끝내고 셋이서 신촌의 맷돼지요리 파는 집을 찾아갔다. 그때는 영운이 혈압관계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할 때였다. 그런데 맷돼지고기 덕에 청주(淸酒)를 데워서 한잔 두잔 들었다. 술기운이 좀 오르니까 영운이 기분이 좋은지 자꾸 받아 마셨다. 이번에는 유경채 씨가 2차 가자고 발동을 걸었다. 유 교수가 “맷돼지 고기를 먹었으니 이번에는 참새고기를 먹자”고 부추겨서 참새구이를 잘 하는 이웃 <동락>으로 자리를 옯겼다. 이 집에는 참새뿐만 아니라 메추리ㆍ꿩ㆍ대합ㆍ염통구이도 파는 집이어서 있는 대로 다 청해 먹었다.
예술원 여성회원들 중 미술분과의 천경자 여사는 담배는 피우지만 술은 마시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선들선들할 것 같은데 퍽 세심한 일면이 있고, 그러나 간혹 기분이 내키면 술도 들고 우스개 소리도 잘 한다. 언제 연구했는지 판소리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아서 그림을 그릴 때도 판소리를 들어야 술술 잘 풀린다고 한다.
문학분과의 김동리 씨와 연예분과의 이해랑 씨도 가끔 어울렸는데, 모두 멋진 술꾼들이서 자리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담준론을 펴기 일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