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의 예언과 화가의 꿈 (2회)

이때 나는 글공부 외에 그림에 이상할 만큼 흥미를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소질도 있었던 것 같다. 집에 소장하고 있던 사군자 문인화 족자를 펼쳐 볼 때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시험 삼아 그것을 모사해보면 사람들이 칭찬할 정도로 그릴 수가 있었다.

내가 그림에 소질을 보이자 주위에서도 자연 관심을 갖게 되어 어느 날 이민응 참서의 아들인 내 친구가 좋은 그림 하나 보여줄 테니 오라고 해서 갔다. 대형 족자로 된 비단에 그려진 인물 초상화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세화(細?)로 의상이나 얼굴표정, 심지어 눈동자와 모발까지 극사실(極寫實)로 그려져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을 대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묵으로 된 문인화 몇 폭을 본 것이 전부인 내가 이러한 공필세화(工筆細?)를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초상화의 작가는 이조 말엽에 이름을 날린 석지 채용신(石芝蔡龍臣)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나의 앞길에 대해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집안 어른들의 생각은 나를 문장명필(文章名筆)로 만들어 입신양명(立身揚名)을 시키려는데 나는 화가의 길을 꿈꾸고 있으니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 채용신 작품 중의 하나인 <황현초상〉/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의 살갗 처럼 촉감적인 피부와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나부낄 듯한 턱수염 묘사 등이 탁월하다고 평가 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원주 변씨(原州邊氏)의 산소를 고향 문경에서 제천군 수산면 다불리(堤川郡水山面多佛里)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 산소는 상지(相地)의 명사(名師) 연서 정상용(蓮西鄭商鎔) 씨가 잡아준 터인데 당시는 물론 근래까지도 모두가 명당이라고 일컫는 산소다.

멀리 금수산(錦繡山)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다불리 평야에 와서 한 봉우리를 일으키고 이 봉우리 앞에는 큰 빌딩 같은 바위가 서 있고 안산은 유명한 단양 옥순봉이어서 누가 보아도 장관이라고 감탄한다. 조부와 막역한 사이인 지사(地師) 연서는 행술(行術)하는 돌팔이 지관이 아니고 조수(操守, 지조를 지키는)하는 선비로서 감여서(堪輿書, 풍수지리서)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이 분이 할머니 산소자리를 잡은 뒤 조부께 약 10년 뒤에 장차 훌륭한 화가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내가 집안에 내력 없이 그림에 빠져드는 것을 보신 할아버님과 아버님 두 분은 잊고 계시던 지사의 예언을 되새기곤 했다. 물론 근거가 모호한 이야기지만 나 자신 역시 때로는 내가 할머니 산소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건 나는 내 취향도 그러려니와 앞으로 내가 나갈 길은 예술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이 무렵 마을 주변의 상황도 차츰 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시류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경찰서, 군청 등 일제의 행정질서도 차차 자리가 잡혀가고 이웃집 자녀들도 학교취학이 늘고 있었다. 나의 고모와 누이들이 출가를 했는데 신랑들이 모두 보통학교 졸업반 학생들이어서 그들이 드나들면서 집안분위기는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아버님의 막역한 이웃친지인 이참서도 사업을 꿈꾸며 빈번히 중국(奉天, 봉천) 여행길에 올랐다. 세상물정이 이렇게 바뀌니 장차 경제생활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변화가 아니었을까.

이 씨 뿐 아니라 주위의 대세가 눈에 띄게 바뀌자 아버님도 나의 전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신 듯 나의 미술공부를 위한 서울행을 허락하셨다. 이즈음 동네 앞에 신작로(新作路)가 뚫리면서 등장한 서울에서 이포를 왕래하는 자동차는 향촌 사람들에게 경이의 대상이었다. 지금 것과 같은 버스가 아니고 9인승 정도의 소형 호로차(천장이나 벽면을 방수천이나 비닐로 덮어 만든 차)였는데 이 차가 지날 때는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 차가 내뿜는 휘발유 냄새는 역한 매연이 아니라 도회와 현대를 상징하는 향기처럼 느껴졌다.

아버님은 이당 김은호(以堂金殷鎬) 선생의 매부인 이웃마을의 서병은(徐丙殷) 씨에게 부탁하여 그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다. 내가 서울로 떠나던 날, 아버님은 달을 좋아하는 내 천성과 우리 마을 이름인 사전(絲田, 外絲里絲田부락)에서 한 자씩 따 ‘月田(월전)’이란 호를 지어주시며 이다음에 훌륭한 화가가 되면 쓰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