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1년의 시한부이긴 했지만 그림 공부를 위한 나의 상경은 우리 집안으로서는 파격적인 용단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님은 서울 길을 떠나는 나에게 서찰(書札) 두 통을 들려 보냈다. 한 통은 서병은 씨가 이당(以堂)에게 써 준 소개장이었고, 다른 한 통은 아버님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께 보내는 친서였다.
위당은 아버님과 오래 전부터 교유(交遊)가 있어 편지내왕이 있었는데 여주에라도 행차하면 꼭 외사리에 들러 이민응 참서 댁과 우리 집을 방문하곤 했다. 그럴 때면 이민응 댁에서 세 분이 고담준론을 펴기도 했다.
아버님은 내가 그림재간을 보이기 전까지는 속으로 위당 같은 문장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막상 나를 그림 공부하라고 서울로 떠나보내면서도 미련이 있어 위당에게 “가돈(家豚)을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나는 서울 와서 지금의 단성사(團成社) 뒤편에 있는 봉익동(鳳翼洞) 99번지에 하숙을 정했다. 셋째 숙부의 장인 원정한(元鼎漢) 씨는 영천(永川) 군수를 지낸 분으로 노경에는 작은 마나님 집에서 기거했는데 그곳이 바로 내가 하숙한 집이다. 내가 19세에 상경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봉익동은 서울의 복판 주택가였다.
나는 거처를 정하고 맨 먼저 위당 댁을 찾아갔다. 위당 댁은 지금의 서대문 미동(渼洞)초등학교 자리 미근동(渼芹洞) 3번지에 있었는데 방에 들어가 큰절을 하고 아버님의 서찰을 내놓았다.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사서삼경을 다 읽었으니 이제는 역사공부를 해야지” 하시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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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필자의 부친께 보낸 서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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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방안을 살피니 오래된 한서(漢書)들이 방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몇 겹으로 쌓여 있었다. 좌우로 책이 빽빽이 놓여 있어 사람이 앉기도 비좁을 정도였다. 위당은 조선역사에 관한 책 한 권을 빼 주면서 틈틈이 읽어보라고 했다. 체구는 작은 어른이 목청은 어찌나 큰지 쩌렁쩌렁 울렸다. 그야말로 금속성이었다.
이 무렵 위당 댁에는 동교 민태식(東喬 閔泰植) 씨와 성균관장(成均館長)을 지낸 운정 성낙서(芸庭 成樂緖) 씨가 수시로 와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위당은 한학자인 동시에 역사학자여서 연전(延專, 연세대의 전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사학자 고 홍이섭(洪以燮) 박사와 언론인 조풍연(趙豊衍) 씨 등이 연전에서 위당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이다.
위당이 연전 재직 시 상(喪)을 당해 굴건제복을 입고 방립(方笠)을 쓴 채 강단에 섰던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다. 내가 위당 댁에 드나들 때만 해도 그 어른은 한여름에도 솜버선을 신고 다니셨다. 이만큼 체통을 중히 여기던 분이어서 아랫사람 대하는 법도도 엄격했다.
나는 낙청헌(絡靑軒)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도 무상으로 위당 댁을 출입했다. 위당은 글자보다는 정신을 중히 여겨 내게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심어주기 위해 신경을 쓰시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