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는 전세가 차츰 불리해지자 회의를 한다고 매일 같이 사람들을 불러내 강제노동을 시켰다.
양식이 없어 안 사람이 나서서 포도장사를 했다. 동성학교 밑 포도밭에서 광주리로 포도를 받아다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팔아서 양식과 바꿨다. 이런 판에 우리 집에 노력동원령이 떨어져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나갈 수도 없는 터여서 이 일마저 내자(內子)가 맡았다. 일이란 현장에 나가 마포 쪽에서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로 쓰일 모래가마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9월 초순이 되자 서울상공에 제트기가 나타나 폭격을 시작했다. 비행기만 뜨면 고사포 진지에서 일제히 대공사격을 하는데 쌕쌔기란 이름의 제트기가 저공비행으로 고사포 진지를 때렸다. 나는 제트기가 남산에 있는 고사포 진지를 부수는 것을 육안으로 목격했다.
유엔군이 인천 상륙하던 날 나는 삽을 가지고 방공호를 만들 생각으로 마당 한쪽을 파고 있었다. 이때 서남쪽 멀리서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이 확실히 이변으로는 느껴졌지만 인천상륙인줄을 몰랐다.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승전보는 큰 안도감을 주었지만 또 다시 시가전이 걱정이었다.
어느새 이대(梨大) 뒤편 금화산에서 상륙한 유엔군 선봉과 인민군이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26, 27일에는 서울역과 종로 일대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시내 곳곳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인민군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우리 식구는 시가전에 대비, 방의 다다미를 모두 빼서 벽에 세우고 그 속에 엎드려 있었다. 한참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지축을 흔드는 우렁찬 기계음이 들려왔다. 국군과 유엔군의 탱크가 대학로로 들어오는 소리였다. 역시 앞 집 박 노인이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경상도 사투리로 소리쳤다.
“뭐하고 있노. 국군이 들어왔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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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 9 서울수복 시가전 서대문 방면이란 팻말이 보인다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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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유엔군이 종로 5가 쪽에서 혜화동을 향해 어느새 서울대 앞길을 메우고 있었다. 큰 길 양쪽으로 일렬종대로 늘어서 들어오는 보병부대는 국군이었다. 이 감격! 이 흥분! 시민들은 어디다 감추어 두었던지 손에 손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나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물을 떠다 주는 사람, 얼싸 안고 우는 사람, 혜화동 로터리는 인파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는데, 탱크부대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밤을 새우면서 돈암동 방면으로 후퇴한 인민군을 향해 박격포를 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서울 수복 얼마 후에 고희동 댁에서 부역자 심사위원회가 열렸다. 고희동, 이종우, 이마동, 이순석 씨 등 이른바 도강파(渡江派) 들이 의기양양해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장인 고희동 댁에는 장발, 이종우, 이마동, 이유태, 이순석,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도강파와 잔류파로 약간 엇갈리는 분위기였으나 진지한 편이었다. 적치(敵治) 3개월 동안 미술인들의 행적을 알아보기 위해 종군화가단 사무국장을 했던 서양화가 이세득 씨를 조사위원으로 뽑아 옥석(玉石)을 가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혼란 중에 일부 미술인들이 몰지각한 행위를 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징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결국 유야무야 끝나는 듯 했다. 한편, 이른바 도강파들이 도상봉, 박상옥, 이봉상, 윤효중, 김환기 씨 등의 이름을 거론, 조사위원회에 넘기기도 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9·28수복을 맞고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에 나는 공군종군화가단에 들어갔다. <미협(美協)> 위원장인 고희동 씨와 부위원장인 장발 씨가 종군화가단의 필요성을 역설, 창단을 서둘렀다. 장발 씨는 공군을 창설한 김정렬(金貞烈) 공군 참모총장과 친한 사이여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들 중 몇 명이 공군 종군화가가 되었다. 장발, 송병은, 김병기, 김정환, 이순석 씨와 내가 공군본부에 가서 종군화가증을 발급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