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몹시 추웠고 중공군이 참전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차 편이 없어 서울에서 여주까지 190리 길을 걸어서 내려가다가 날이 저물어 남한산성 입구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고향 집에 도착했다. 어머님을 뵙고 집에 내려와서 살고 있는 큰 누님과 이웃에 살던 셋째 누님을 만났다.
이때 혹한에 눈까지 와서 노인과 부녀자들을 어찌할 것이냐 싶어 누님들에게 어머니 잘 모시고 있으라고 이르고 무거운 발길로 집을 떠났다. 전세가 급박해서 주춤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천(利川)으로 나와서 멀리 포 소리를 들으며 수원으로 걸어 나갔다. 또 하루가 저물어 용인 못 미쳐 양지(陽智)의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내가 주막에 든 초저녁에는 2간 장방에 나 혼자뿐이었는데 밤이 되자 드러누울 자리 없이 사람이 막 들어왔다. 서울에서 내리밀린 사람들이 낮에 중앙청에 붉은 기가 올랐다면서 내일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중공군 포위망에 걸린다고 초조해 했다.
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깜깜한 어둠을 뚫고 종종걸음으로 오산에 도착, 마침 볏섬을 싣고 후퇴하는 무개차에 빌붙어 대전까지 갔다. 대전의 처남 집에 들러 식구들을 만나보고 다시 대구나 부산으로 내려갈 생각으로 역에 나가 동정을 살폈다.
대전역에서 대구·부산방면 피난민은 일체 태워주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또 종군화가 증명을 보이고 대전역에서 화물차에 올랐다. 화물차라지만 무개차 볏섬 틈에 끼어 앉아 내려가는데 날은 혹한이고 기관차는 힘이 없어 밤중에 추풍령고개를 힘겹게 기어오르다가 마침내 고개 마루턱에서 멎고 말았다.
산야에 눈이 하얗게 덮여 그믐밤인데도 훤했다. 기차는 요지부동, 이 무인지경 노천에서 밤을 지샌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동사하는 것이 아닌지 다급해졌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마른나무를 구해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었다. 불기운이라도 쬐어 볼까하고 얼씬거렸지만 사람들이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어 불기운은커녕 바람막이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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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후퇴 당시 군수 물자가 실린 무개화물차에 오른 피난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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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큰일 날 것만 같아 은신할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찾아다녔다. 맨 뒷편 창고차 있는 쪽으로 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가느다랗게 사람소리가 들려나왔다. 나는 문틈에다 대고 사람 얼어 죽게 생겼다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문을 조금 비켜줬다. 나는 기를 쓰고 올라갔다. 칠흑의 창고차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이 꽉 들어차 서 있었고 그들의 체온 때문에 훈훈했다.
문턱에 서서 얼마를 기다렸더니 서서히 차가 움직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김천역에 도착했는데 총든 헌병과 미군MP가 기차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내리게 해서 신분을 조사했다. 나는 예의 종군화가증 덕분에 그 차에 다시 탈 수 있었다.
기차는 대구역 못 미쳐 지천(地川)역에서 멎었다. 길이 막혀 더 이상 갈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천에서 대구는 지천이어서 언제 움직일 줄 모르는 기차를 타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논둑 밭둑을 걸어서 대구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대구 초입 지천 냇가 다리에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지키고 서서 시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았다. 이때도 예의 그 종군화가증을 보이고 대구에 들어가 외종매(外從妹) 황우호(黃佑浩) 집을 찾아갔다.
외종매부 황 씨는 오래전부터 대구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고 잘 사는 터라서 얼마간 신세를 져도 괜찮은 집이었다. 며칠 동안 이 집에 머물면서 일 없이 답답한 심정으로 대구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부산은 피난민으로 만원이 되어 들어앉을 방조차 없고 서울미대도 휴교상태라고 한다. 앞 일이 난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설초(이종우)를 만났다. 설초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이순석(李順石) 씨도 여기 와 있고 대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종군화가단 사무실도 있다고 알려줬다. 나는 우선 종군화가단 사무실부터 찾아갔다. 대구 시내 중심가 빌딩 2층에 10여 평 되는 방이 종군화가단 사무실인데 ‘국방부 정훈국 선전과 미술대’라고 씌어 진 간판이 붙어 있고 남하한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 사무실 책임자는 현역 중위인 강경모(姜京模) 씨였고 그의 직함은 미술대장이었다. 미술대에는 박득순, 박영선, 김중현, 이순석, 손일봉, 김인승, 이유태, 이세득 씨가 관여했다.
대구에서 나는 한솔 이효상(李孝祥) 씨 사랑채에 들어있던 미대 동료 이순석 씨를 만나 한솔과도 첫 인사를 했다. 한솔은 나에게 피난 와서 고생한다며 도움을 주려고 애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