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을 마치고 가족들이 있는 대전에 가서 집안을 정리,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는 방직공장을 하는 외종매 황우호가 있고 있어서 방직공장 사택에 식구들을 맡겨놓고 나만 서울대 피난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미술대학장 장발은 미국 미네소타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어서 미술대학은 이채훈(李載壎)씨가 학장서리를 맡고 있었다. 이 씨는 일본 상지대(上智大)에서 철학을 전공, 휘문고보에서 장발 씨와 함께 교편생활을 하다가 서울대로 옮겨 미학(美學)을 가르치던 분이다.
그때 미술대학은 송도(松島)해수욕장 옆 큰 길가에 있는 일본 요리집 방 몇 개를 빌어 쓰고 있었는데 8조 짜리 다다미방 서너 개를 교수실, 강의실로 나누어 썼다. 8조 방 하나가 교수실 겸 교무실이었고, 강의실은 방들을 툭 터서 교수와 학생들이 다다미 위에 앉아 이야기 하는 식으로 가르치고 배웠다.
교수들은 여기서 합숙하고 나와 김종영, 송병은, 공형식 교수가 함께 자취하고 있었다. 이순석 교수도 있었지만, 그는 가족이 내려와 있어서 통근했고, 서무과의 김창준(金昌俊), 한영삼(韓永三) 씨도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학장서리로 있던 이제훈 씨, 송병돈 씨, 공형식 씨는 모두 술을 좋아해서 나와 어울려 피난살이의 설움도 달랠 겸 바닷가 대폿집을 종종 찾았다.
피난살이도 차츰 자리가 잡히고 장발 학장도 돌아와 우리는 송도 뒷산에 터를 확보, 판자집을 지어 미술대학 간판을 달았다. 비록 가교사이긴 해도 전망이 좋아 학교 경치는 그만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의실과 실기실도 마련되어 학생들은 남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공부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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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송도 가교사 앞에서 회화과 일동 / 앞줄 양복 입은 이 좌측부터 송병돈, 장발, 필자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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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우리들은 아르바이트도 했다. 영도(影島)에 있던 대한도자기 회사에서 수출하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다. 지영진(地榮珍) 사장의 배려로 작업장 겸 숙소를 배정받아 3, 4명씩 그룹을 지어 일했다.
이에 대한도자기회사에서 나와 함께 일한 학생들은 김세중(金世中), 문학진(文學晉), 장운상(張雲祥), 박세원(朴世元), 권영우(權零禹), 박순일(朴順一) 등이었다. 고향에 가 있던 박노수도 부산에 내려와 복교하고 도자기 그림도 그렸다. 나와 학생들이 대한도자기 그림을 그릴 때 이곳에는 우리 말고도 이당(김은호), 소정(변관식), 혜촌(김학수) 등이 와 있었다.
도자기 그림은 수출품이어서 주로 한국 풍속도를 많이 그렸는데, 나는 따로 방을 얻어 박세원, 권영우 군과 함께 있었다. 박세원 군은 돈독한 가톨릭 신자여서 봉사 정신이 강할 뿐 아니라 성격도 차분해 취사당번을 하고 영도시장에서 반찬거리도 사왔다.
이때 나는 학교에서 현미(玄米) 7, 8두(斗) 씩 배급을 받아 식량걱정은 없었으나 모두 홀아비 생활이라 궁색한 게 많았다. 광목과 솜을 사다가 박순일 양에게 부탁해서 이불을 꾸미는데, 박 양은 바느질 솜씨는 괜찮으나 이불에 솜 둘 줄을 몰라 애를 먹었다. 우스운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이때 권영우 군과 박순일 양이 열애 중이었는데, 박 양의 아버지가 반대해 내가 중간에 서서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주었다. 서울미대에는 여러 쌍의 동문 부부가 있고, 모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그때 권 군과 박 양 두 사람은 성사 여부로 약간 긴장하고 있을 때다. 마침 박 양의 아버지가 부산에 내려와서 만남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승낙을 받은 것이다. “권 군은 착실할 뿐 아니라 생각이 깊어 다른 청년 같지 않아 박 선생 따님 데려다가 고생시키지 않을 테니 한 번 맡겨보자”고 했더니 박 씨도 “딸에게서 권 군의 사람됨은 들어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중매장이가 되고 권 군과 박 양은 행복한 커플이 됐다.
나는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대구에 가족들을 만나러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마다 부산-대구를 내왕했다. 아이들이 밤과자를 좋아해서 집에 갈 때면 밤과자 두 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고 대구에 갔다.
부산-대구 내왕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미술대학이 송도 일본요리집에서 판자집 가교사로 옮겨 가자 나도 학교 일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도자기 그림도 그만두고 부산에 정착했다. 식구들은 영도 영선동에 데려다 놓았다가 다시 송도로 이사, 학교 아래 산허리에 세워진 조그만 집에 세 들어 살았다. 피난생활도 차차 자리가 잡혀서 큰 불편 없이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