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 때 학생들과 약속한 대로 미학과와 미학과 교수는 문리대로 이관되었다.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낸 후 비술대학에 예술학과를 신설할 생각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오늘날까지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1960년 7.29선거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학교는 안정을 되찾았다. 장발 학장이 이탈리아 대사로 내정되어 후임 학장을 결정해야 하는데, 장 학장이 후임으로 박갑성 씨를 지명하고 교수들에게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갑성 씨는 문리대 교수가 되었다가 사태가 가라앉은 뒤 미대로 복귀한 후였다. 학장 선출은 총장 임석 하에 투표로 결정하게 되어 있어서 윤일선 총장이 학장 선출 현장에 나왔었다. 미술대학 학장들은 장발 전임 학장의 뜻에 따라 만장일치로 박갑성 씨를 밀어줬다. 이렇게 해서 박갑성 씨가 제2대 서울대 미술대학장이 된 것이다.
한편 장발 씨는 이탈리야 대사로 나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양복이며 모닝코트 등을 맞추고 학자에서 외교관으로 변신을 위해 여려 가지를 익혔다. 그러나 로마 출발을 며칠 앞두고 5.16쿠데타(61년)가 일어나 장발 씨의 외교관 생활은 좌초에 부딪히고 말았다.
나도 <학장운동사건>으로 정이 들지 않고 장발 씨마저 난감한 입장이 되어 마음이 뒤숭숭한 판에 신임 학장이 공무원 신분상 사생활을 규제하는 군사정부의 공문이 왔다며 떫은 표정을 보여 즉각 사표를 제출했다. 이때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국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권위를 과시했고, 공무원 사회는 지나칠 정도로 기가 위축되어 몸을 사리는 형국이었다.
미술대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전임 장발 씨를 만나 사임한 사실을 이야기 했더니, 그런 경우에 무슨 사표냐고 하면서 신임 학장이 경험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 후 군사정부의 문교부장관이던 문희석(文熙奭) 씨와 감찰위원장 채명신(蔡命新) 씨 등을 만나 사표를 낸 경위를 이야기 했더니 그들도 이구동성으로 사표를 낼 이유가 못된다고 하면서 재심을 청구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단념하고 이 일을 계기로 내 일에 전념해 보다 보람 있는 일을 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일할 터전인 화실을 갖기 위해 수소문 했다. 그런데 마침 내가 거래하는 표구사 상문당(尙文堂) 주인이 자기 표구사 근처에 적당한 집이 났다고 알려줘서 즉시 관훈동 뒷골목에 있는 앙옥집 2층을 세로 빌렸다. 10여 평 되는 방을 화실로 꾸미고 <월전화실(月田畫室)>이라 명명하였다.
내가 화실을 냈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더욱이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서독 등 우리나라 주재 외교관 부인들이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와 배우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자 매사에 적극적인 그들은 그룹을 만들자고 제의, 오환회(五環會)‘를 조직했다. 오환회란 올림픽 마크를 본 따 ’세계의 가족‘이란 뜻으로 내가 붙인 이름이다.
언어 풍속이 각각 다른 이들이 어찌나 열심인지 가르치는 보람도 있으려니와 순진무구한 그들의 자세는 부럽기까지 했다. 이때 공부한 외국 사람들은 미 해군 사령관 프레시 소장 부인, 미국 대사고나 루이스 참사관 부인, 독일 대사 핑거 부인, 일본공사 가미카와 부인 등 20여명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이갑성(李甲成) 씨 부인 최마리아 여사, 박병래(朴秉來) 씨 부인 최구(崔鳩) 여사, 이범석(李範錫) 씨 부인 이정숙(李貞淑) 여사, 정규섭(鄭圭燮) 씨 부인 최인숙(崔仁淑) 여사, 송인상(宋仁相) 씨 부인 최연순 여사와 이인실(李仁實), 원문자(元文子) 씨 등이었다.
외교관 부인들은 자기들의 그림이 신기한 듯 전시회를 한번 하자고 부추겼다. 그래서 62년 봄에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오환회 전시회>를 열었다. 지금처럼 액자로 표구하지 않고 대부분이 족자로 만들어 출품했다. 전시 첫날에는 당시 외교사절단장인 상바르 프랑스 대사가 나와서 축사도 했다. 오환회 전시는 생각보다 성황이어서 각국 외교관들은 물론 외교관 가족들이 몰려와 이채로웠으며 신문, 방송들도 우리 모임을 민간외교의 결실이라고 크게 다루어 주었다.
나는 오환회를 지도하는 한편 61년 10회 <국전>에 출품할 그림을 그렸다. 깨끗한 백로(白鷺) 한 마리가 소나기를 맞고 날아가는 작품인데, ’소나기‘라고 제목을 붙였다. 서울대 미대를 퇴임할 때의 허허로운 심정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도 비교적 호평이어서 그 후 어느 공관에서 소장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