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여름에 워싱턴에 가서는 모든 게 생소할 뿐이었다. 우리 대사관의 이범석 참사와 서울에서 나에게 그림 공부를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오환회원들만이 유일한 친지였는데, 시일이 지나면서 차츰 많은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 객지 생활의 외로움도 줄어들고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서 각별하게 지내던 서예가 일중(김충현)의 아우 김정현(金政顯) 씨는 그때 워싱턴에 살면서 독신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연령의 차이는 있었지만 형님의 친구라고 나에게 각별하게 대해서 일중을 만난기분으로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미국생활에 서투른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도와줬다. 그 덕에 장면(張勉) 박사의 큰 아들 장건(張建) 씨도 만났고, 전 서강대 교수인 박내회(朴乃會) 씨도 알게 되었으며 최초의 뉴욕 구경도 김 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같이 가서 친절한 안내를 받기도 했다.
알랙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의학박사 최제창(崔濟昌) 씨는 처음 워싱턴에 가서 이범석 씨 댁에 머물고 있을 때, 그 댁의 초대를 받아 여러 사람과 함께 만찬을 들면서 알게 되었는데, 나에게 계속 호의를 베풀어 자별한 사이가 되었다. 개성(開城)이 고향이 최 박사는 오래 전에 도미하여 성공한 교포 중의 한 사람으로 내과병원을 경영하면서 워싱턴 한인회 회장도 지냈다. 내가 워싱턴에 있는 동안 몸이 불편하면 최 박사를 찾아갔는데, 의료비를 받지 않아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 밖에 우연히 만나 격의 없는 친분을 맺은 두 분이 있는데, 직업적으로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어서 처음에는 약간 서먹한 듯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속이 트였고, 나 역시 이색적인 만남이어서 흥미를 느꼈다. 양유찬(梁裕燦) 씨는 주미대사를 지냈고, 그때는 순회대사였는데, 비교적 한직(閒職)인 것 같았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나를 만나면 동양화에 대하여 궁금한 것을 붇고, 본국의 화단 사정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외교관답게 부드럽고 차분한 성격이어서 만나서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정치평론가로 알려진 김용중(金龍中) 씨는 내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터인데, 이 분은 이승만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워싱턴에 있으면서 국내외 언론에 비판기사를 실어 이 박사를 매도 공격하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성격이 강직해서 잘못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외골수여서 부슨 일인가로 백악관 앞에서 일인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내가 워싱턴에 가서 몇 달 후 어느 날 뜻밖에 김 씨가 나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의외의 일이라 놀랐으나 김 씨는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가 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그 분도 비교적 한가한 편인 듯 가끔 찾아와서 격의 없는 대화를 했고, 어떤 때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대접도 했다. 그때 정원에는 대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동양식 정원을 연상케 했는데, 청담(淸談)한 그 기품이 이 주인과 닮은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 내가 워싱턴에 와서 초대인으로 알게 되고 차차 깊은 친교를 맺은 두 사람이 있는데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던 김성진(金聖鎭) 씨와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실업가 박동선 씨다.
김 씨는 맨 처음 대사관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만났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외모나 성격이 세련된 신사이고 대인관계가 부드러워서 금방 오랜 친구같이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키브릿치 건너 알링통의 아파트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내가 단신으로 외롭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항상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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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싱턴 동양예술학교에서 제자 이열모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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