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에는 말로만 듣던 제3 땅굴과 휴전선의 아군 초소를 방문하여 당직 장교의 설명을 들으면서 굴속으로 들어가 보고, 망원경으로 분계선 너머 북쪽의 논과 밭, 마을과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언덕 넘어 송악산도 바라보았다. 초겨울을 맞이한 산하(山河)의 조용한 모습은 가로지른 철조망만 없다면 평화로웠던 옛날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위장된 고요 속에 감도는 살벌한 공기, 이 비극의 현장에 서서 ‘조국’, ‘동포’, ‘혈육’을 입속으로 수 없이 뇌까려보았지만 그것은 메아리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인적이 끊긴 휴전선 언덕에는 메마른 갈대만이 바람에 나부끼고, 구름가에 돌아가는 철새의 울음도 처량하기만 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어느 지하에서 제4, 제5의 땅굴이 파여지고 있지나 않을는지...
남과 북! 왜 우리는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맞서야 하나? 왜 우리는 제 나라 제 땅을 가지도 오지도 못해야 하나? 그리고 우리는 왜 한 핏줄 한 형제끼리 칼을 품고 이를 갈며 노려보아야 하나? 알다가도 모르겠다.
8.15 해방 전 나는 경원선 열차를 타고 금강산도 가고 경의선을 타고 평양에도 가보았다. 그때 그 아름답던 일만이천봉의 장관과 대동강, 모란봉, 고구려의 유적들, 그리고 그 북녘 동포들의 따듯하고 순박했던 인정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귀에 아련하다. 그러나 끊기고 막힌 지 거의 반세기. 이제는 모두 다 어찌 되었을까? 궁금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주의’, ‘사상’, ’체제‘에 얽매인 가여운 무리들! 그 폐쇄된 깜깜한 장막 속이 어찌되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오늘날 이 마당에 어린 애 잠꼬대 같은 소리겠지만 긴 악몽에서 깨어나듯 서로가 덥석 부둥켜 안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면서 회한의 눈물을 쏟아 동족의 사랑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그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인가?
임진강 남쪽 언덕에는 오늘도 철마(鐵馬)가 북을 향해 서 있다. 어떻게 경의선 철길을 다시 이어놓고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신의주까지 치닫게 하고 남보란 듯이 한번 오순도순 재미나게 살아볼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한스럽고 생각할수록 애달프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만 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다. 체념처럼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다 같이 남북통일을 고대하며 노력해나간다면 통일도니 날은 틀림없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핏줄을 타고 태어나서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이 세 나라로 갈라져 살던 삼국시대에도 결국 통일을 보고야 말았던 우리 민족이다. 갈대 우거진 휴전선 언덕에 망연히 서서 분단 민족의 비원에 가슴 속이 저려 옴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