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뜻밖에 일본 세이부미술관[西武美術館]의 초대를 받아 1988년 8월 19일에서 30일까지 3주일간 동경 긴자[銀座]에 있는 유락구조[有樂町] 아트포럼 전시장에서 세이부미술관,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주최와 한국대사관 문화원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신작과 구작 50여점으로 연 이 전시회는 예상보다 성황이었다. 초대일에는 미술관 경영주인 스스미세이지[堤淸二] 회장(세이송그룹)을 위시하여 저명 미술인, 미술평론가, 언론계 인사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 미술평론가 가와기다 린메이[河北惀明] 씨의 개회 인사와 축사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축사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략)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에 생채(生彩)가 있는 견확(堅確)함, 그리고 청향(淸香)한 격조, 정신의 충실함 등과 같은 점에서 우리들의 공감을 부른다. 더군다나 어쩌면 고래(古來) 동양화의 진면목이 현대의 기류 속에서 갈 방향을 잃고 쇠약해가기만 하는 이 상황 속에서 의연하게 그 기맥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일본에서 상실되어 가고 있는 하나의 줄기가 아직도 청결하게 생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전시회가 열리기까지 세이부미술관이 나에게 베푼 후의에 나로서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 저간의 경과를 간단히 적어본다. 88년 4월 전시회 초청장을 보내온 뒤, 5월에는 실무를 협의하기 위하여 기노구니[紀國] 관장(館長)과 고도 과장이 직접 서울에 와서 상세한 계획 및 절차를 의논했고, 6월 하순에는 나의 작품을 사전에 관람, 전시목록에 도사(導辭)를 쓰기 위해, 가와기다 린메이[河北惀明] 씨가 일부러 서울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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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세이부미술관 초대전에서 인사말을 하는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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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기다 린메이 씨는 전 교토국립현대미술관장(前 京都國立現代美術館長), 전일본미술평론가회장(前 日本美術評論家會長)으로 촌가(寸暇)의 여유가 없는 바쁜 사람이다. 7월 중순에는 작품 포장과 운송을 위해, 미술관 직원 세 명이 와서 3일 간의 꼼꼼한 작업을 마치고 돌아갔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전 준비도 극히 드문 일이거니와, 작품 왕복 수송비, 보험료 등 일체를 미술관 자체 부담으로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세이부 미술관이 일본의 세계적 재벌기업의 경영체라 하지만 그들의 실리주의 체질에 비추어서 볼 때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인 듯하다.
전시회 개막 2일 전에 내가 나리타공항에 도착해서부터 귀국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호의는 끔찍하였다. 공항에 마중 나온 미술관 차로 그들이 마련해놓은 호텔에 도착하니, 우선 호텔(자기회사 경영)자체가 특급인데다가 방에 들어서니 ’축(祝)‘자 리본을 단 큰 꽃바구니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나의 작품 <일식(日蝕)>을 원화보다 크게 확대한 포스터가 은빛 액자에 끼워져 정면 벽에 걸려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미술관장 주최로 일본 전통 요정에서 환영만찬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일주일동안 호텔 체제비가 미술관 부담이라고 알려주면서 당장 필요한 용돈이라며 두툼한 봉투까지 건네주었다. 나는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도리어 어색했다.
전시 중에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 니혼 게이자이[日本 經濟] 등 주요 신문들이 연달아 크게 보도하면서 작품 사진과 함께 <긴장과 유정(幽靜)>, <연마된 기의 응집>, <전통미에 현대 기법> 등의 찬사를 보내준 것은 이번 전시의 보람이라고 생각된다. 요미우리신문 25일자 석간에 실린 장문의 평 중에 과거 일본 화단의 거장인 다케우치 세이호[竹內栖風], 가와아이 교쿠도[川合玉堂], 마츠바야시 케이케츠[松林契月], 가와바다 류시[川端龍子] 등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향수를 되새긴 구절은 흥미 있는 일이다.
며칠 동안 동경에 체류하면서 나는 정강현(靜岡縣)에 있는 후지[富士]미술관도 참관했다. 그 미술관에서 나의 작품 두 점을 구입하면서 초대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이 미술관은 널리 알려진 일본의 ’창가학회‘가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가까운 거리의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경관이 아주 수려하고 건물도 웅대하며 수장품도 다양해서 훌륭한 미술관이라고 느꼈다.
마침 동경대학에 연구실을 가지고 있는 이병창(李秉昌) 경제학 박사가 전시회에 찾아와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는데, 이 박사의 제의로 가루이사와[輕井潭]에 가서 다이아시마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겼다. 가루이사와는 동경 서북방에 위치한 한적한 소도시로 풍광이 명미할 뿐 아니라 고원지대여서 여름에 시원하기 때문에 일본의 황실이나 귀족들의 피서지로 유명하다. 골프장 시설도 호화로웠고 식당은 고급 호텔 수준이어서 골퍼들의 낙원같이 보였다. 18홀을 마친 뒤 이 박사의 수림 속 별장에서 차를 마시면서 환담을 나눈 것은 지금껏 기억에 새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