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 15일 우리 예술원 회원 네 명은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中國人民對外友好協會)‘의 초대로 북경(北京), 상해(上海), 서안(西岸) 등을 공식 방문했다. 유경채, 김충현, 나, 박노수와 안내자 박종각 씨를 포함한 다섯 명은 14일 홍콩에서 1박, 다음날 오후에 북경에 도착했다.
미수교국(未修交國)이고 사회주의 국가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니 생각이 착잡했다. 공항에서 우호협회 업무 고문인 조체화 씨의 영접을 받아 곤륜(崑崙)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생각보다 정돈된 현대식 호텔이었다. 이날 밤 침대에 누워 공자(公子)의 나라이자, 6.25때 혹한 속에 우리를 피난길로 내몰았던 중공군의 나라에 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어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조반을 마친 뒤 우리를 초청한 우호협회를 북경 대기청(臺基廳) 1호로 방문했다. 협회의 왕음(王音) 이사와 황세명(黃世明) 회장 등 중요 인사들과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눴는데, 극히 친절한 접대였다. 앞으로 한중(韓中)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중국 측의 태도는 매우 진지해서 신뢰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동사장(童事長) 겸 총경리인 김소성(金蘇城) 씨를 만난 것은 기연(奇緣)이었다. 김 씨는 조선족으로 일찍이 러시아에 오래 있었으며 북한에도 근무한 적이 있는 중요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정치적, 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하면서 국제 정세에도 밝은 지식인이었다. 초면이지만 동족으로 깊은 이해와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며칠 머무는 동안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역시 초체화 고문의 안내로 중국화연구원과 고궁박물원, 자금성(紫禁城) 등을 방문했는데, 자금성은 우선 그 웅대한 규모에 놀랐고 호화를 극(極)한 건축술과 정교한 조각미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화원에서는 유발서 부원장의 안내로 넓은 응접 홀에서 수십 명의 연구생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었고, 각 연구실도 방문, 작업 실황을 참관했다. 화원은 글자 그대로 화가들의 집단 연구실의 총본부 같았다. 화가 한 사람이 쓰는 연구실은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화탁, 화구 등 작업에 필요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며 건물을 둘러싼 연못과 그 위를 연결하는 회랑(回廊). 태호석(太湖石), 죽목(竹木)으로 알맞게 배치한 우아한 조경은 화가들의 정서를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다. 참으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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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오른쪽 뒤로 김충현, 박노수 씨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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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중국 현대회화의 원로대가인 이가염(李可染) 씨와 오작인(吳作人) 씨를 방문했다. 이가염 화백은 제백석(齊白石)마지막 대가다. 자그마한 아파트 3층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매우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넓지 않은 응접실에 우리 일행과 우호협회 직원들이 들어서니 공간이 좁았지만 주인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차를 내오고 느릿느릿한 말씨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연관성을 이야기 하는데 전형적인 후덕한 동양의 노인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표구하지 않은 근작 수십 점도 보여주는데 예의 은유(隱喩)와 낭만이 깃든 수묵담채의 인물과 풍경화는 그다운 중량감이 화폭에 스며 있어 역시 대가의 관록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작인 씨 때도 아파트였고, 응접실 규모나 생활상태도 이 씨와 비슷한 듯했는데, 오 화백은 건강이 안 좋은 듯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둬서 초면이지만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전 날 중국화연구원에 갔을 때 정문 입구에 큰 글씨로 써서 걸어놓은 현관 글씨가 오 씨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서예 이야기를 하다가 현관글씨 한 폭 써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오 화백은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때 나는 서울 삼청동에 월전미술관(月田美術館)을 신축 중이었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부탁했던 것이다.
나는 귀국해서 건축공사 등 분주한 생활 속에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몇해 뒤 오 화백은 나의 부탁을 잊지 않고 서울 주재 중국대사관을 통해 글씨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한중 수교 후 나는 오 화백의 글씨 <월전미술관>이라는 다섯 자 주련(柱聯)을 족자로 표구해서 귀중한 소장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날 저녁에는 우리를 위해 우호협회가 베푸는 초대연에 참석했다. 초대 받은 음식점은 북경에서도 유명하다는 ‘전취덕’이라는 오리요리 호화식당이었다. 주최 측의 황 회장을 비롯한 세 사람 외에 화가, 서예가 등 7, 8인이 참석한 이날 연회를 참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서예가 중 당대 중국의 대표적인 원로 서예가 계공(啓功) 씨가 참석한 것은 이채로웠다. 서예뿐 아니라 역사에도 밝은 지식인으로 이날 저녁 통역을 사이에 두고 였지만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는 과거 한 중 관계사를 이야기 하면서 청 건룡황제(靑 乾隆皇帝)의 열한 번째 아들 성친왕(成親王)의 생모가 조선족이고 명 영락황제(明 榮樂皇帝)의 모후, 권씨(權氏)가 조선족이라고 설명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비화(秘話)여서 매우 흥미로웠다.
북경의 오리요리는 진미였다. 만찬이 시작되자 흰 위생모를 쓴 주방장이 소형 운반차에 구운 오리를 운반해가지고 식탁 앞에 와서 즉석에서 썰어서 올리는데 마치 미국인들이 성탄절 때 칠면조를 요리하는 것과 같았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만리장성과 명 십삼릉(明 十三陵)을 구경하러 갔다. 이날 우호협회에서 봉고차를 보내왔는데, 김소성 씨가 동행해서 차 중에서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차 무간해져서 내가 왜 중국은 구미와 교류를 꺼리느냐고 물었더니 김 씨는 중국이 과거에 심각한 외침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문호를 개방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또 우리 한국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자원도 없는데, 민간차원에서 중국의 무진장한 천연자원과 어떤 교역같은 것을 할 수 없겠느냐고 넌지시 묻자 김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중국의 황하(黃河)가 토사(土砂)가 쌓여 하상(河床)이 높아진 것이 문제인데, 한국인이 운반선을 가지고 와서 황하의 모래를 퍼가면 서로 좋을 것이지만 작업할 수 있는 부두시설이 없어 불가능한 거라고 말했다.
명 십삼릉에 도착해서 만력(萬曆) 황제의 지하궁전과 만리장성의 어마어마한 축조물을 보며 옛날 중국사람들의 초인적인 발상과 끈질긴 건설능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의 희생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을까를 생각하니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18일에는 청조 서태후(西太后)의 이화원(頤和園)의 만수산(萬壽山)과 곤명지(昆明池)를 보고 유리창(琉璃廠)도 구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