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북경 문화상가의 심장부다. 북경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누구나 한번은 들르지 않을 수 없는 명소이고, 그만큼 중국 고금(古今)의 역사문물이 총집결된 특수지대다. 청시대에 북경을 왕래한 우리나라 사신들의 기록에도 유리창 참관이야기는 심심찮게 나타난다.
이곳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고전적(古典的)인 상가다. 고색이 창연한 점포들이 늘어선 거리, 서가마다 가지런히 꽂혀있는 오래된 책들, 일일이 쪽지로 표시해놓은 책 이름들을 대충 훑어보니 처음 보는 진서(珍書), 기서(奇書)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나 동행들의 발길이 멈춰주지 않으니 혼자 낙오될 수도 없는 일. 나에게 필요한 책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 듯 해서, 발 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하루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다음 골목의 옛 인장(印章)을 파는 가게에서 뜻밖에 깜짝 놀랄만한 옛 명인(名人)들의 손때 묻은 전각(篆刻)들을 발견하고는 북경에 온 보람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고인(古印)을 수집해온 나는 이미 중국의 명각(名刻)들을 소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 만나보기를 원하던 진품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들어본 고인 가게는 조그마한 빌딩 2층의 한적해 보이는 점포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70세 쯤 들어 보이는 영감이 혼자 앉아 있었다. 옛날 인장을 보여 달라고 하자 주인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랍 속에서 명함갑 만한 예쁘게 만든 나무갑 10여개를 꺼내 놓는데, 알아보니 한 갑에 한 개씩 조그만 인장들이 빨간 우단 천에 싸인 채 들어 있었다. 닳고 닳은 반짝이는 돌들, 선명한 성명(姓名) 인문(印文)과 방각(傍刻)들을 읽어본 나는 깜작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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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진경(顔眞卿), 조지겸(趙之謙), 정판교(鄭板橋) 등 전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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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5백 원짜리 만한 둥글고 새까만 금속에 단정한 전서(篆書)로 새겨진 진경(眞卿)인 골패짝보다 작은 전황석에 새겨진 조지겸(趙之謙) 사인(私印), 판교정섭(板橋 鄭燮)의 자각 사인(自刻 私印), 진홍수(陳鴻壽), 해철생(奚鐵生) 등 중국 미술사의 대표적 거장들의 체취가 묻어 있는 명각(名刻) 명인(名人)들이 고스란히 모여 있지 않은가! 참 희한한 만남이었다. 당의 안진경(顔眞卿), 청의 조지겸(趙之謙), 정판교(鄭板橋)! 이들은 중국의 국보급 존재들이다.
나는 놀라는 빛을 보이지 않고 그 중의 5, 6과(顆)를 따로 뽑아 놓고 값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서서히 나를 훑어보면서 일본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어째서 그 인장들만 사려고 하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잠자코 주인이 부르는 대로 꽤 비싼 대금을 치르고 사가지고 나왔다. 아마 중국에서도 이러한 진품(眞品)들은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19일 아침에는 항공 편으로 서안(西安)을 향해 떠났다.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였던 옛날 장안(長安)인 이 도시는 질서정연한 현대적 시가지 계획이 인상적이었다. 시 중심부에서 정(井)자 형으로 설계된 도로가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었고 성루(城樓)에 올라가보니 좌우로 뻗은 성곽(城郭) 위의 도로가 광장 같이 넓다. 그 위에서 장병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전투를 지휘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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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안탑에서 / 좌로부터 박노수, 필자, 김충현, 유경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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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大雁塔) 소안탑(小雁塔)과 비림(碑林) 실크로드의 출발점을 알리는 거대한 기념조각, 그리고 불가사의로 불리는 병마용(兵馬俑)의 교묘무쌍한 조소(彫塑)상등을 접할 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진시황(秦始皇)의 풍모가 새삼 궁금할 뿐이다.
20일에서 24일까지 4일 간은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계림(桂林), 소주(蘇州), 항주(抗州)를 연달아 방문했는데 가는 지방마다 우호협(友好協) 지부에서 차를 대기시키고 호텔도 미리 정해줘서 불편 없이 요소요소를 돌아볼 수 있었다.
계림의 우뚝우뚝한 산세와 특이한 이강의 낭만적인 풍치가 인상적이고, 소주의 베니스 같은 수로(水路)의 아름다운 원림(園林), 졸정원(拙政圓), 전설 깃든 한산사(寒山寺)가 감회가 깊었다. 특히 석성공(釋性空)주지스님의 호의로 유서 깊은 종을 울려본 것은 기억에 남는다.
바다 같은 항주의 서호(西湖), 그리고 송(宋)의 거유(巨儒) 소동파(蘇東坡)기념관과 고대 중국화의 거장 오창석(吳昌碩)기념관, 유적이 자리한 서령인사(西泠印社)는 특히 지나칠 수 없는 명소다. 이곳은 관광의 대상이기보다는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예술인들의 산 교육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