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16일 나는 연래(年來)의 숙원이던 미술관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종로구 팔판동(八判洞) 35-1번지, 대지 270평, 건평 400여 평의 작지만 아담한 건물을 짓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을 끝에 가족,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기공식을 가졌다.
나는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거듭해왔지만 힘이 벅차는 일이었다. 그러나 굽힐 수 없는 의지 하나로 일을 벌이면서 각오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닌 활성적인 장(場)으로 만들 것과 공(公)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법인(法人)을 설립할 것, 그 안에 종합예술연구회를 설치하고 이론 강좌를 개설하여 미술상(美術賞) 제정도 동시에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건축공사 진행과 더불어 당장 재단이사회를 서둘러 구성했다. 다행히 문화예술계의 대표급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자랑스런 열 세분의 이사진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11월 13일 첫 이사회의에 참석한 분은 황수영(黃壽永), 김원룡(金元龍), 이대원(李大源), 김충현(金忠顯), 유경채(柳景埰), 박노수(朴魯壽), 권영우(權寧禹), 이열모(李烈模), 송영방(宋榮邦), 이영찬(李永璨), 장정란(張貞蘭), 민경갑(閔庚甲), 장범구(張範九), 장우성 등 이사회 감사 합 14인이었다. 이사회의에서는 이상과 같은 나의 기본 구상에 적극 찬동하여 일사천리로 의결해주었다. 이리하여 미술관의 골격이 구체화되고 예정대로 사업은 실천단계로 옮겨갔다.
한편 신축현장인 팔판동은 청와대(靑瓦臺)와 직선거리 100여 미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뜻밖에 몇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우선 건축물 신축허가를 관할 구청에서 하지 않고 대통령 경호실에서 다루어 지연될 대로 지연되었으며 건물의 고도제한(高度制限)이 엄격해서 2층 이상을 올릴 수 없는 제약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멋모르고 계약을 체결한 건축회사 유원건설(有元建設)이 공교롭게도 청와대 춘추관(春秋館) 신축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 걸핏하면, 우리 미술관 공사현장의 인력을 무단차출 해 춘추관 현장에 투입하는 바람에 우리 일이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자주 생겨 건축회사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시간이 흘러 기공한지 1년 4개월 만에 준공을 보고 91년 2월 2일에 대망의 새 건물에 입주하게 되었다. 조경공사도 대충 끝나 조경수(造景樹) 식재에 이어 연못에 물도 넘치게 되어 예정했던 대로 ’한벽원‘이란 미술관 편액을 정문 위에 내걸었다.
|
|
| ▲ 寒碧園 41.5*107.5cm (1999.) |
|
한벽원(寒碧園)이란 이름은 고서(古書)의 죽색청한(竹色淸寒) 수광징벽(水光澄碧)’에서 취의(取義)한 것으로 대나무 같이 밝고 차며, 물빛처럼 투명하고 푸르다는 뜻인데 선비정신을 상징적으로 함축시킨 말이다. 즉 혼탁한 환경 속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 해보고 싶은 심정을 세 글자로 압축해본 것이다. 흔히 대리석에 검은 글자로 새긴 이 간판은 여러 사람의 관심과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한벽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나는 일일이 답변하기 어려우면 미소로 대신하기도 했다.
계획한대로 미술강좌를 열어 많은 영재(英材)가 모여 들었고, 알찬 <한백문총>을 발간했으며, 우수한 작가에게 미술상을 시상해서 예상 이상의 좋은 성과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재단의 기본 예산이 여유롭지 못해 뜻하는 바 문화사업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아쉽기만 하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건물의 규모가 작아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힘이 벅차는 일이나 재도약을 위하여 2000년 7월 기존건물 정원 남쪽의 구옥(舊屋) 세 채를 다시 구입하여 확장공사를 시작했다. 나로서는 가볍지 않은 또 한 번의 모험이었으나 미술관 운영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에 목표달성을 위한 일념으로 강행을 시도한 것이다.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다행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하 1층 지상 5층의 백월(白月)빌딩을 올리고 정원을 넓혀 강의실을 신축하고, 작지만 정자 서운정(栖雲亭)도 짓고 보다 큰 연못도 마련했다.
현재 우리 동방예술연구회를 졸업한 정회원은 150여명에 달하며 <한벽(寒碧)동인회원전>은 이번이 4회째이고 ‘월전미술상’은 지난해까지 5회를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의 간단한 연혁을 적어보았다.
|
|
| ▲ 장학구 이사장, 류철하 학예실장과 함께, 백월빌딩 앞에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