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는 전람회 같은데 작품을 내서 큰 상을 받으면 기쁘기도 하고 흥분도 했었지만, 차츰 나이가 들면서 그런데 관심이 줄어들고 어쩌면 분수 밖의 포상을 받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지는 판국이다. 그런데 의외로 몇몇 귀한 상을 받게 되니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어쩐지 쑥스럽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유능하고 공적도 높은 인사들이 많은데 노경에 든 내가 무슨 상을 받는가 생각하면 자괴감마저 들기도 한다.
지난 95년에는 이상하게도 몇 차례 귀한 상을 연달아 받게 되었다. 1995년 5월 초순 어느 날 광주의 연진회(鍊眞會) 회장인 김옥진 화백이 찾아왔다. 김 화백은 그동안 의제 허백련 선생 기념사업회와 광주시가 공동으로 의재(毅齋) 예술상을 제정한 사실을 알리면서 제1회 수상후보로 나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천만 뜻밖의 일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우선 의재예술상이라면 당연히 호남출신 예술가가 수상하는 것이 순리이고 호남에는 훌륭한 예술인이 많은데 굳이 외지에서 수상자를 찾을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퇴역군인이나 다름없는 처지이니 재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김 화백은 운영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한 일이라면서 간곡히 수락을 종용하여 어쩔 수없이 수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시상식 전날인 6월 1일 오후에 광주에 도착, 무등산 파크호텔에서 상 운영위원회의 여러분과 미술인 동지들, 그리고 보도진과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 그날 저녁 광주시가 마련한 환영만찬회에 참석했는데, 참 호화로운 모임이었다. 광주가 예향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남도 특유의 성찬과 국악인들의 현란한 가무음곡은 가지끈 흥을 돋구었다.
다음날 오전의 시상식도 성대해서 모처럼 남도에 와서 큰 대접을 받는 것이 감사했고,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허백련(許百鍊) 선생의 유덕을 기릴 수 있는 행운은 감사했다.
식이 끝난 다음 나는 옛날 조선시대 높은 선비들이 은둔했던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참관했다. 그윽한 원림 속에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와 고색창연한 정사들, 울창한 왕대 숲을 거닐며 고즈넉한 감회를 느꼈다. 그날 저녁 나는 어제 환영자리를 마련해준 여러분을 요정 송죽원에 초대하여 간곡한 사의를 표했다.
이 해 2월에는 익산 원광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3월에는 한국 애서가(愛書家)협회의 애서가상도 받았다. 그런데 원광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때는 다행히 대만의 저명한 화가 구호년(歐豪年) 씨와 필리핀의 문교차관인 페퍼안교 씨가 같이 학위증을 받게 되어 외롭지 않은 잔치 자리가 되었다.
애서가상(愛書家償)은 나로서는 참 자랑스런 상이었다. 자랑스럽지 않은 상이 없겠으나 평생을 그림과 글씨와 책과 더불어 살아온 나로서는 ‘책’하면 무조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정신의 양식을 담은 그릇이니 그 귀중함은 자랑 정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상이 특히 자랑스럽고 고맙다.
상복을 누린 95년은 내 생애에 가장 화려한 해인 것 같다. 그동안 소극적이고 주변이 없어서 사회생활에서 항상 뒤처지기만 하다가 거듭 행운을 맞이하게 되니 더욱 수줍어지는 기분이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내가 75년에 받은 5.16민족상과 2001년에 받은 금관문화훈장도 빼 놓을 수 없는 생애의 명예여서 이 글의 말미에 적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