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Stadt Köln) 동양미술관에서 가진 서독전(82년 6월 26일 ~ 8월 8일)은 1980년 프랑스 정부 초청으로 파리 시립 세루느스키미술관에서 열렸던 파리전 때 이야기되었던 것이다. 서독 미술관계자들이 파라에 와서 내 작품전을 보고 “프랑스전에 내 놓은 작품을 그대로 서독으로 가져가 전시할 수 없겠느냐”고 제안해왔다. 나는 “그것도 좋지만 신작을 내놓고 싶다”고 말했더니 쾰른 미술관 측은 81년에 하자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작품제작 기간이 너무 짧아서 82년에 하기로 약속했다. 당시 서독은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계획했던 일들을 유예하는 실정이었지만 쾰른 동양미술관이 나와 약속한 전시회만은 쾰른 시장(市長)이 2년 전에 이미 정부 차원에서 약속한 일이라고 시 예산을 할애해줘서 예전대로 진행된 것이다.
쾰른에 도착하여 전시장인 쾰른 동양미술관에 찾아가보니 벌써 작품진열이 되어 있었다. 작품들은 미리 항공편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6월 26일부터 시작인데 개관 하루 전인 25일에 나는 미술관 홀에서 초대회견을 가졌다. 오전에는 11시부터 신문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일간지와 미술잡지의 기자 20여명이 참석해 주로 작품 내용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오후에는 6시에 초대 인사를 위한 파티를 열었다. 그날이 마침 서독과 이탈리아가 월드컵 축구 대결을 벌이는 날이어서 동양미술관 관장은 손님이 적을까봐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섯 시가 되니 손님들이 많이 몰려와 박물관 안 극장식으로 된 리셉션 룸을 가득 메웠다.
로저 괴퍼 관장은 초청한 2백여 명의 인사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도 초청인사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했고, 통역은 쾰른대학에서 철학박사 과정에 있는 사위(尹敬)가 맡아서 했다. 초청인사들은 모두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서 칵테일파티에 참석했다. 작품 제목을 모두 독일어로 번역해서 작품 밑에 붙여 놓았더니 관람자들이 빠짐없이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초청인사뿐만 아니라 일반 관람객도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여간 진지하지 않았다.
본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단체로 몰려와 전시장을 돌아보고 즉석에서 세미나를 여는 진풍경도 보여줬다. 베를린박물관에서는 사람들이 와서 보고 전시회 유치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국자들은 쾰른전에 내놓은 작품들을 몽땅 베를린으로 옮겨 전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갑작스러운 일이라 예산이 서 있지 않아서 빨리 성사되기 어렵겠다고 몹시 아쉬워했다.
전시 중에는 쾰른의 부부화가가 내 그림에 관심이 많은 듯 몇 번이나 와서 보고 나를 화실로 초대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화실은 물론, 좀처럼 내보이기를 꺼린다는 작품까지 샅샅이 보여줬다. 그가 나에게 “서양화가 배운성(裵雲成)을 아느냐”고 물어서 “잘 안다”고 했더니, “배운성과 베를린대학 동창”이라면서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배운성은 북한에 가고 한국에 없다고 했더니, 안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서독에 머무는 동안 이웃나라들을 돌아봤다. 먼저 베를린 국립박물관을 살펴보고, 동ㆍ서독의 장벽도 보았다. 망대(望臺)에 올라가 동독을 넘겨다보면서 우리와 사정이 다른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이때 베를린은 육로는 막히고 비행기로만 왕래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해적선 <바이킹>,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인어조각>,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안네의 집>을 본 것이 인상적이었다. 각 나라들의 박물관, 미술관 등을 돌아보면서 특히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서 렘브란트의 작품을 대하고는 이 작가가 얼마나 정력적인 작가인가를 직감할 수가 있었다. 1천호가 넘는 대작이 한두 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독에서 전시를 하는 동안 나는 귀한 친구 하나를 얻었다. 바로 내 작품을 전시해준 <쾰른 동양미술관> 관장 로저 괴퍼(Roger Goeper)박사다. 그는 영어는 몰론, 중국어 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더욱이 한문에 조예가 깊어서 작품의 화제(畵題)를 척척 읽고 뜻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내 작품의 내용이 다양할 뿐 아니라 동양의 철학이 담겨 있는 그림이라고 극찬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말한 동양 3국의 미술평은 예리했다. “중국화는 너무 전통에 치우친 감이 있고, 일본 그림은 현대식에 치우친 감이 있으나, 한국의 회화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촌평을 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우리는 명실공히 전통화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그림을 그려야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나이 먹는 게 자랑이 될 수 없지만 고희(古稀)가 되던 해에는 매스컴에서도 우대를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전재하면서 근세 우리 화계(畵界)의 실상과 내 일생을 회고하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은 행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