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사업이 커지자 따라서 선친의 요정출입도 잦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오시는 선친에 대해 어머님의 심정이 편안할 리는 없었다. 더구나 당시 선친은 38세의 한창 나이였으므로, 돈 잘 쓰는 미남자 경영인에 대한 기방에서의 유혹은 대단하였던 것 같다. 이리하여 어머님은 점점 선친께 의심과 불만을 품게 되었고 점차 신경이 쇠약해지더니 나중에는 위신경 쇠약증이 되고 말았다. 미음을 한 술만 들어도 곧 체하고 말았다.
드디어 어머니는 상수구리에 있는 집이 살기 싫다고 하셨다. 이것은 내가 서울에 올라가 대학예과에 다닐 때의 일인데 선친은 할 수 없이 상수구리 집을 작은 아버님께 맡기고 신양리로 잠시 이사 갔다가 기림리에 새로이 큰집을 지어 이사를 갔으며 가재 도구일체를 모두 새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어머님과 함께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셨다.
이와 같이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어머님의 병환은 점차 회복되셨지만 이때부터 어머님은 남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음식을 들지 않으셨고 그리고 성격도 전보다 많이 냉냉하고 차갑게 변하였다.
기림리 집에서 사는 동안에 부모님은 며느리를 보셨고, 또 손녀(영채)와 장손(영준)을 보셨다. 부모님이 재숙을 시집보내는데 혼수를 다섯 트럭 분이나 보내 평양매일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로 재숙을 편애 하면서 장남인 나에게는 너무도 홀대를 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신 신의주 큰 고모님은 선친과 어머님을 나무라시고 다시는 평양에 오시지 않았다.
나는 이집에 있는 동안에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총독부의 관리가 되어 경상북도로 가게 되었다. 그 후 선친께서는 자손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하여 생활 근거를 서울로 옮기기로 결심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영단이었는데 해방 이후에 우리 집안이 대한민국에서 이만큼이나마 살아남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친의 이때의 결단 때문이라고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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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부벽루에서 찍은 사진(1942년) / 좌로부터 부인, 장녀, 석우, 그리고 동생들, 오른쪽 끝이 모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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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이 평양에 정착하기 시작한 후부터 약 200여년 정도가 지나서 우리집은 이제 서울로 그 본거지를 옮긴 것이다. 성북동에 있는 백인기씨 별장(전북 이리의 갑부)은 대지가 20,000평이 넘는 궁궐 같은 집이었는데 우리는 해방직전인 1945년 3월 이 집을 구입하여 수리해서 이사하기 시작하였다. 거의가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 아래 넓은 대지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세 채로 나누어진 기와건물에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이 어우러진 호화 주택이었다.
나중에 이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1980년대 말까지는 요정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이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사용하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부부와 애들이 같이 사용하던 별채는 절경 내에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 말기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옮기는 것은 권장되었으나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전면적인 이사는 불가능하였고 우선 급한 대로 한 트럭분의 가재도구만 옮겨 놓은 채 곧 이어 8.15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8월 말에는 대구에 있던 나의 식구들도 서울로 올라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대구에서 철도편으로 부친 이삿짐을 해방 직후의 혼란 틈에 몸땅 잊어버렸으므로 결국 빈 털털이가 된 채로 성북동의 대저택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서울로 이사 오신 선친은 친구 분인 장진섭씨와 합작하여 그 당시 35만원에 반도호텔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을 구입하셨다. 그러나 곧 해방이 되어 미군이 들어와서 그 호텔을 빌려 쓰게 되자 9월부터는 임대료를 받으면서 그 호텔안 사무실에서 호텔의 관리사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무실에서는 관리사무는 물론 미국인을 만나러 오는 면회객과 주로 미국에서 돌아오는 교포들의 대기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46년 2월경 미군정법령이 공포되어 반도호텔이 정부 귀속재산으로 강제로 편입되면서 선친은 이 호텔을 빼앗기게 되었고, 그 대신 영등포에 있는 조선타이어공장(한국타이어의 전신)의 관리인이 되셨다. 이 공장도 역시 귀속재산이었지만, 반도호텔을 빼앗은 대신에 이 공장의 관리인 직을 미군정부에서 준 것이다. 이때부터 선친은 영등포에 있는 조선타이어 공장으로 출근하셨다.
그러는 동안에 성북동 집에 말성이 생겼다. 백인기 씨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그의 손자가 성북동 집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에게 판 것인데 당시 그 손자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백씨 집안의 친족회의의 동의를 얻어 매매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그 손자가 전라남도 시골 어딘가에 있는 그의 고모의 동의가 빠졌다고 계약무효 소송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대법원장 김용무(6,25때 피납)는 원고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결국 2년간의 재판 끝에 우리는 패소하여 성북동 집을 내놓게 되었다. 때마침 평양에 있던 기림리 집이 팔리게 되어 그 돈으로 중구에 있는 한국전력회사의 독신자 아파트로 사용되던 집을 사게 되었는데 이 집이 나중에 우리의 본적지(을지로 4가 244)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