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에 다니면서 나는 특별히 입학시험 준비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구문사의 첨삭회에 가입하여 한 달에 세 번씩 구문사에서 보내오는 문제에 답을 써 보내는 것으로 그만이었고 그 밖에 특별히 시험준비라고 따로 공부하는 것은 없었다. 시간에 여유가 많았으므로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서 술도 마시고 또 좌익서적을 읽기도 하였다.
학교에서는 때때로 상급학교 지원생을 위하여 모의시험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여기에서 매번 1등을 하였기에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이 조금도 마음에 부담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원학과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문과로 정하였으나 예과를 끝내고 학부(법문학부)로 진학해서는 무슨 학과를 택할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학과로 가도 모두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자포자기 비슷한 심정에 빠져 있었으며 오직 마음 속에는 계급투쟁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1935년 2월이 되자 나는 평양중학교에 다니던 김봉관 군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제기동에 있는 하숙집에 들었다. 그리고는 청량리에 있는 대학예과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전체적으로 4대 1의 경쟁률이었지만 조선인 학생은 전체의 3분의1 만을 뽑았기 때문에 실제 경쟁률은 일본인 학생 2대1, 그리고 조선인 학생은 10대1이 되었다.
시험을 끝내고 나와 제기동 입구에 있는 다리에 걸터앉아 대학예과의 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3년 후 예과과정을 마치고 난 뒤 나는 어머님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린 일이 있다.
ʻ제가 3년 전에 대학예과의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제기동 다리에 앉아 학교 쪽을 바라 보면서 내가 저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인가 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이 다리에 다시 앉았읍니다. 그러나 3년 동안에 많은 것을 공부한 것 같으나 오히려 지금의 저의 심정은 더 무식해졌다는 생각뿐입니다.ʼ
평양에서 편지를 받으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만큼 더 성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매우 기뻐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시험을 끝내고 평양으로 돌아가 발표를 기다렸는데 우리 두 사람 모두 합격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봉관 군은 2등 그리고 나는 4등으로 합격되었다고 한다. 평양고등 보통학교의 같은 학년에서는 이기련 군과 나만이 이 대학예과에 합격하였다.
이군은 나와 동갑이요 같은 양덕 태생이었는데 나중에 6.25동란 당시에 포대령으로 명성을 떨쳤고 박정희 소장과는 5.16 모의도 한 일이 있었으나 거사 전 3월에 길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상급학교에 합격하였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공부시간이 되어 교실로 들어가는데 어떤 학생이 내발을 걸어서 나를 자리에서 넘어뜨렸다. 이 학생은 전부터 항상 나를 괴롭혀 왔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그동안 쌓였던 분통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나는 그 학생의 멱살을 잡고 교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 우선 박치기로 넘어뜨리고는 쓰러져 있는 그 학생 위에 책상을 집어 던졌다. 책상에 깔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위로 계속해서 다른 책상을 던졌고 이리하여 교실에 있는 책상의 반 이상을 그에게로 던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옆에 있던 다른 학생들은 그저 보기만 할 뿐 다행히 한 학생이 와서 나를 말렸다. 양순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놀랐다면서 모두들 들러붙어 산더미 같이 쌓인 책상을 치우고 그 속에 깔려있는 학생을 구출해냈다. 그 학생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쎈 편이지만 나의 기합에 눌렸음인지 그 길로 피해가 버렸으며 그 후로는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며칠 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그와 만난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지금 그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해방 후에도 남쪽으로 오지 않았다.
졸업식을 거행하기 전에 먼저 성적표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나는 2등으로 졸업하게 되었고 14등까지는 우등상을 준다고 하였다. 고모님은 나의 우등 졸업을 축하해주신다고 손목시계를 하나 사주셨고 졸업식에는 전 가족이 참석하였다.
수석은 박인각 군이었다. 그는 나와 같이 양덕 태생인데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시험을 보았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평양고등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기 때문에 자동 케이스로 경성법학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우등상은 나를 빼고 13명만 받았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담임선생인 미우라 교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지난 봄의 일로 1일간 정학처분을 받은 일이 있으므로 우등상을 주지 않기로 하였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등상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졸업식장에 나오신 집안의 어른들은 크게 실망하였으나 그러나 제국대학에 이미 합격은 되었으니 그것으로 모두 위안을 삼았다.
졸업식 날 저녁에 우리들 몇몇 학생들은 교복차림으로 술집으로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거리를 누비면서 고성방가를 하다가 드디어 서문로에 있는 화신백화점에 들어갔다. 여점원 앞에 놓여있는 상품 더미 중에서 하나를 뽑아들자 쌓아 논 상품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는 여점원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등 백화점전체를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도 이것을 바라보는 손님들은 그저 너그럽게 웃기만 하였다. 이때부터 나의 활동 무대는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옮겨지게 된다. 내 나이가 19세 때의 일이었다.
평양을 떠나기 직전에 나는 기림리 근처에 있는 양촌(평양 서쪽에 있던 미국인 거주지역)을 지나다가 미국인 선교사의 유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나를 끌고 회관 안으로 들어가 열심히 기독교 선전을 하였다. 나는 본래 감리교 목사의 외손자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의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었으므로 그 선교사의 말에 별로 거부감을 갖지는 않았다. 이러한 나의 태도가 그 선교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판단을 갖도록 하였던 모양인데 그는 곧 한 장의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면서 서울 가거든 정동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미국 선교사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 가지고 나와 며칠 후에 서울로 올라갔지만 얼마 동안은 정신없이 바쁘게 다녔다. 처음 만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도 마시고 앞날의 대학 생활도 설계하면서 하루하루가 흥분된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가 한 달 쯤 지난 다음에 그 선교사의 편지가 생각났다.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너무 늦어진 것인데 나는 그 편지에 호기심이 나서 그 봉투를 개봉하여 편지의 내용을 살짝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내용 속에 국학의 아성인 경성 제국대학에 침투시킬 프락지 한 사람을 발견하였으니 이 학생을 잘 활용하여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는 취지의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서는 형언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나를 그들의 이용물로 쓰겠다는데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 것이며 이때부터 기독교에 대하여 생리적인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