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1962) 유고슬라비아 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갔다. 미국의 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준 호화스런 호텔에 들었다. 2월 7일 비엔나시내 구경을 하다가 왕궁 앞 광장 건너에 있는 시청과 대학을 갔는데 이 대학에 한 때 켈젠 선생이 교수였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깊었다. 전차를 타고 교외에 있는 쇤 부런궁전을 찾았는데 여기는 악성 베토벤이 활약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8일 아침에 비엔나를 떠나 도중에 취리히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제네바에 내렸다. 이한빈 공사에게 미리 연락해 놓았으나 공항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외무부에서 준 수첩에 쓰여진 주소를 따라 우리 공관으로 갔다. 그러나 한국 공사관은 그곳에 없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간 것이 외무부 수첩에는 정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부근의 호텔을 찾아 들어가 전화번호부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이 공사가 나왔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는 나를 찾아왔다. 그날 그는 연하구 참사관과 함께 칼빈교회 옆에 있는 중국집에서 저녁을 샀다. 2월 9일 아침에 나는 걸어서 간단히 시내 구경을 하고는 Hermes‐Baby라는 휴대용 타이프라이터를 샀다.
2월 9일 제네바를 떠난 비행기는 천천히 알프스 상공을 돌면서 구석구석을 구경시킨 후 로마 공항에 도착하였다. 대사관에서 직원이 나와 마중하였다. 과도정부 때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종찬 대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구경을 많이 하였다. 바티칸 성당, 콜로세움, 교외의 세바스티아노 묘지와 쿠오바디스 교회도 가 보았다. 천년의 고도라서 볼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하루는 피렌체에 가기 위하여 아침에 호텔을 나와 우선 인사차 대사관에 들렸다. 그런데 이 대사가 말을 꺼내더니 도무지 그치지를 않는다. 기차 시간이 지나갔지만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점심때가 되어 중국 음식을 시켜 먹으면서도 계속 말을 하다 결국 저녁때가 되었다. 별수 없이 나는 여행을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방에서 쉬려고 하는데 또 이 대사가 전화를 걸어 자동차를 보낼 터이니 대사관저로 와 달라는 것이다. 관저에서는 이미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나는 밤늦게 호텔로 돌아 왔다.
이처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세상에 나는 본 일이 없었다. 호텔로 돌아갈 때에 나는 가지고 간 일본어판 금강경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2월 13일에는 아테네로 갔다. 미국 여행사에서 연락을 받고 나온 그리스 여자가 나를 호텔로 안내해 주었다. 객실은 초라하였으나 나는 6.25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바 있는 그리스군 사령관 Daskarolis 중장의 안내를 받았다. 파르테논 신전을 구경하고 변두리에 있는 극장에 가서 그리스를 소개하는 영화를 보았는데 우리 한국과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은데 놀랐다.
아테네 대학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그리스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음식을 먹겠다고 하니 양 간속에 치즈를 넣고 올리브유로 익힌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그 하나를 입에 넣으니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배인을 불러서 쏘크라테스나 플라톤도 이 음식을 먹었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마도 그럴 것 이라고 대답하였다.
밤에 내가 들어있는 호텔의 맞은편 호텔 앞이 시끄러워 이유를 물으니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소련의 가가린이 그 호텔에 묵고 있어 그리스 좌파 학생들이 그 호텔 앞에서 밤이 새도록 환성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14일 아테네를 떠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로 갔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서인데 공항 직원이 나의 트렁크를 팬암기로 연결되는 벨트 위에 올려놓지 않고 자꾸 이상한 손짓만 한다. 돈을 달라는 눈치였는데 나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호주머니에 있던 양담배 한 갑을 꺼내 주었더니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기분이 좋아서 트렁크를 벨트 위에 얼른 올려놓았다. 이리하여 나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단숨에 동경까지 왔다.
2월 15일 하네다 공항에는 역시 승선관이 마중 나왔다. 아사쿠사에 있는 일본식 여관에 짐을 풀고 저녁에 부근에 있는 유명한 복요리 집을 찾았다. 오랫동안 서양 음식을 먹으며 고향 맛이 그리웠기에 일본에 와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라는 기대를 잔뜩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맛이 별로였다.
나는 지배인을 불러서 나는 한국인으로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이 복요리로 유명하다고 해서 왔는데 복요리가 한국에서 먹는 것 만큼 맛이 없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 얘기가 그거야 당연한 것이 일본에서는 하관복을 알아주는데 사실은 한국의 울산에서 잡은 것을 들여다가 하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본에 공급한다는 것이다. 당신네 나라가 복의 본고장이니 그 곳 복요리가 더 맛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말에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동경에서는 5일간 묵으면서 그동안의 여독도 좀 풀고 승군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이미 과거에 동경에는 여러 차례 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구경할만한 곳이 없었다. 당시의 일본은 국민 1인당 소득이 1.000불 정도였으며 전쟁 때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2월 20일 김포에 도착하였다. 내 몸은 극도로 피곤해 있었다. 무려 4개월 동안의 긴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