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문제와 서울대 집회 (113회)
  제16장 공직생활4

삼성재단의 성균관대 포기

삼성의 이병철 씨가 1966년에 성균관대학의 경영을 인수한 이후부터 삼성 측에서는 이 대학의 운영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부로부터 우수한 교수들을 많이 초빙하였으나 기존에 있던 교수들과의 사이에는 융합이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의 교수들은 틈만 나면 삼성 재단을 비난하고 다녔다.

9월20일부터 학생들이 삼성재단을 규탄하는 데모를 매우 강하게 벌이자 대학 당국에서는 9월30일까지 휴강에 들어갔다. 학생데모 이유는 재단 측에서 자금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9월 28일 이대순 고등교육국장에게 지시하여 성대 재단의 감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또 한편 9월30일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 군과 점심을 같이 하면서 수습방안을 강구하였다. 삼성 측에서 무슨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문교당국으로서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어느 정도의 방안을 논의 한 후에 장관실로 돌아오니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홍 사장과 만나고 있던 그 시간에 이병철 씨는 현승종 성대 총장을 불러서 성균관대학에 대한 포기 선언을 하였다는 것이다. 삼성은 본래 대학운영에 성의가 없었으므로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되었다.

10월4일 재단이사회에서 정식으로 성균관대 포기를 의결하였고 10월5일 현 총장으로부터 삼성이사진의 사퇴서를 받았다. 10월6일에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뒤 이어 민관식 씨를 이사장으로 하는 관선 이사진을 선임하였다.

법대 제자인 김진우 판사가 여러 번 나를 찾아와 이조실록에 가록된 내용을 제시하면서 사육신 속에는 유응부 대신에 김문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록을 조사해 보니 김 군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기록들을 국사편찬 위원회에 보내 검토해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또 하루는 유진오 씨가 나를 만나자고 하였다. 역사에 나온 기록 몇 구절 때문에 500년 동안이나 사육신 속에 유응부를 인정해왔고 또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생각해볼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국사편찬 위원회에서는 김문기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는 보고를 해왔다. 그러나 나는 유진오 선생의 말씀에도 고려할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절충하기로 하고 그것을 서울 시장에게 통고하여 ‘사육신 속에 김문기를 넣되 유응부를 빼지 말고 분묘를 7개로 할것’이라고 하였다.
 
▲ 회갑논문을 증정받고 있다 (1978.)

후에 나는 김문기의 후손인 김효수와 재혼하였고 또 유응부의 후손인 유영을 사위로 맞았으니 모두에게 섭섭지 않게 처리한 것이라 할까. 그런데 1982년이 되자 엉뚱한 오해가 생겨났다. 즉, 언론에서 김문기의 후손인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압력을 넣어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과 관련하여 김재규로부터 전화 한 통도 받은 일이 없고 만일 그가 주동이 되서 일을 추진하더라도 주무부인 나를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김진우 판사가 제시한 이조실록의 기록과 유진오 선생의 말씀만을 가지고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10월9일 일요일. 나는 친구들과 뉴 코리아 골프장으로 운동하러 나갔다. 그런데 이날문공부 주관으로 여주에 있는 영능이 새로 단장되어 대통령의 임석 하에 세종대왕 숭모제가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고 대통령의 옆 자리에 문공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문공부에서는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골프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 차관이 곧 집으로 연락해 주었고 이리하여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여주로 달려가 숭모제에 참여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렇게 냉담하고 쌀쌀한 것이 관계의 공기였다.

서울대생 집회

10월7일에 서울대생 500명이 강당에서 농성하면서 시국에 관한 불순한 노래를 불렀다. 대학당국은 5시15분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학생들은 나오지 않았고 밖에 운집해 있던 많은 학생들도 그들을 성원하였다.

결국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밤 8시 반 경에 모두 해산되었는데 이때 경찰에 연행된 학생은 360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 날의 사태가 이처럼 장시간 지연된 것은 경찰의 태도 때문이었다. 사태가 벌어지자 김치열 내무장관은 자신의 명령 없이 경찰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경찰은 학생들이 집단화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기동경찰이 기민하지 못하게 대처한 사태에 중앙정보부와 문교부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10월19일이 되어도 서울대 사태에 대한 해결책은 서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은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1년간 문 닫아 두는 동시에 사태 책임을 물어 윤천주 총장의 사표를 받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윤 총장은 지금 열심히 뛰고 있으니 사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사태가 악화된 것은 경찰이 그 할 일을 안했기 때문이지 윤 총장에게 책임을 돌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통령에 대한 나의 반항이요, 이로 인해 나중에 장관 자리를 물러나게 되는 빌미가 된다. 반면에 서울대 교수들은 10월8일부터 휴강에 들어간 관악 캠퍼스가 곧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문을 1년간 닫으라고 나에게 지시한 것이다.

나는 관악캠퍼스를 1년간 문을 닫는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서울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서 차마 못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그대로 덮어두는 것으로 또 다시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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