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와 나-1 (17회)

5학년에 진급한 어느 봄날 우리 집 옆에는 어떤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 30대 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의 직업은 알 수 없으나 그는 나에게 의도적인 태도로 접근해 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일본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일본에서 활약하다가 잠시 이곳 평양으로 들어와 숨어살고 있는 몸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어느 날 제이빈걸물어(第二貧乞物語)라는 책을 주면서 굉장히 좋은 책이니 꼭 보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그 청년과 나 사이의 교제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그 청년이 좀 간교해 보이고 인상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책은 나에게 엄청난 파장과 씨앗을 뿌렸다. 본래 이 책은 경도제국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가와까미 하지메(河上肇)씨가 쓴 것으로 당시 일본의 권위 있는 월간지 개조(改造)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이다. ʻ제2ʼ라고 되어 있으므로 ʻ제1ʼ이 먼저 쓴 것 같으나 그것은 알 수가 없다. 빈걸(貧乞)은 가난이라는 뜻이고, 물어(物語)는 이야기라는 정도의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란 뜻이며 여기에서 가와까미 교수는 공산주의의 이론을 아주 쉽게 풀어서 쓰고 있다.

이 책 때문에 일본과 조선에서 공산주의의 신봉자가 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만큼 이 책은 당시에 큰 선풍을 일으켰으며 이 책으로 말미암아 가와까미 교수는 일약 명사가 되었다. 그러한 책을 이 괴상한 청년은 나에게 읽으라고 권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받아들고 읽고 또 읽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책에 심취하였고 그리고 철저한 유물론자가 되고 말았다. 여순에서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공산주의는 나에게 잘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대학 입학시험을 앞에 둔 몸이었으므로 그 이상 깊이 공산주의 공부에 파고 들지는 못하였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공산주의에 대한 더 깊은 연구는 나중에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다만 이 책을 읽은 다음에는 나는 방향을 돌려서 자연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리하여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180도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선친께서도 나의 속마음은 모르시고 내가 법문학부로 가겠다는 데에 찬성하셨다.

▲ 최근 출판된 카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물어>

이리하여 나는 1935년 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 갑류(영어, 독일어 전공은 을류)에 들어갔고 처음의 반년 동안은 그저 술만 마시며 놀기만 하였다. 좋은 학교에 들어갔으니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남이 하는 대로 따라만 한 것이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학원 안에서 폭력 사건(후술)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나는 조선인 학생들이 보여준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그때부터 나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보기 시작하였다. 이때에(19세) 주로 읽은 것이 역시 공산주의에 관한 책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얼마 동안 하다 보니 나는 이미 일본에서 출간된 공산주의 서적은 다 읽었으며 이리하여 나는 열렬한 공산주의의 광신도가 되어 버렸다.

1936년의 일이며 이때에 이미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의한 제2차 5개년계획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저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이쪽에서는 그러한 나라를 마치 이상천국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또 하나의 광신자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공산주의 책은 얼마든지 출판하게 하였지만 다만 일반이 읽어서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의 과정에 X자 표시로 가리고 출판하게 하였다. 이것을 복자라고 불렀는데 이 때문에 중요한 대목을 읽을 수 없게 된 당시의 사람들은 큰 불만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그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 박종국과 최은섭의 소개로 그 학교의 백남운 교수를 찾은 일이 있었다. 그는 후일 해방된 다음 김일성의 밑에서 오랜 동안 문교상을 지낸 일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개조사에서 출판한 세계사상전집의 하나로 조선사회 경제사를 집필하여 당시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나는 백 교수에게 묻기를 책을 읽다 보면 복자가 많이 나와 기분이 나쁜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했더니 그의 대답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서 읽으면 다 알게 됩니다. 공산주의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우리 동양에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좋은 말이 있지 않느냐며 그것을 생각해서 책을 읽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복자가 한두 개 정도라면 몰라도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반 페이지 가량 계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때에 아무리 정신일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때 나는 밖으로 나오면서 일본 책은 복자 때문에 불편하니 독일어로 된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서적을 직접 읽기로 결심하고 그 길로 본정통(지금의 충무로)에 있는 환선서점(마루젠서점)을 찾았다. 이 책방은 양서를 취급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지금도 일본 동경 은좌에 있는 마루젠서점은 양서를 파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루젠서점에서 나는 독일어로 씌어진 공산주의 책을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독일에서는 바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공산주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고 또한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으므로 따라서 독일어로 된 공산주의 책은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부름수상이 인솔하는 인민 전선파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마루젠 서점에서는 프랑스어로 씌어진 공산주의 책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