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와 주교동에서의 생활 (34회)
  제6장 해방 후 사회생활

을지로 4가 244번지는 우리 집의 본적지로 되어 있는 곳이다. 남북 분단이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 않았으므로 미군정에서는 각각 그 거주지를 본적지로 신고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나는 매일 필동에 있는 조기열 군을 찾았다. 그의 동생인 기목 군이 필동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기열 군은 그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나하고는 평양 고등 보통학교의 같은 반이었고 일본의 사가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왔으며 고문에 합격하여 함흥에서 판사로 있다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소개로 임민영 씨를 알게 되었다. 임 씨는 이범석 씨의 족청계(민족 청년단) 사람으로 삼의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성북동에서 다리를 앓고 있을 때에 임 씨의 권고로 써놓은 원고가 있었는데 을지로로 온 후에 그 출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것이 1948년 3월에 출간된 표준세계연표이며 이것이 나의 처녀작이다. 다만 기열군의 집요한 요청으로 공저의 형식으로 되었다. 자기가 중간에 나섰기 때문에 이 책의 출판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곧 일어난 6.25 사변으로 절판이 되었다. 책이 나오기 전에 나는 그 가쇄본을 가지고 미군정청의 사법부(지금의 법무부)를 찾았다. 당시의 사법부장은 나중에 우리정부의 대법원장이 되신 김병로 씨였고 차장은 한근조 씨였는데 한 차장은 평양에 계실 때부터 선친과는 친교가 있는 분이었다.

나는 그 분을 찾아가 이 가쇄본을 보여 드리면서 취직을 부탁하였다. 새로 생긴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동양사를 강의하고 싶다고 첨가해서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법부와 문교부는 각각 그 소관이 달랐기 때문에 내가 한 선생을 찾아간 목적은 조금도 추진되지 못하였다. 다만 그 소식을 어떤 경로인지 모르게 유진오 씨가 알게 되었고 그 뒤의 일은 다음에 설명될 것이다.

조기열군과 같이 있던 당시, 조 군을 잘 아는 것 같이 보이는 한 중년 신사가 찾아왔다. 무슨 청년단의 간부인 모양인데 콧수염을 기르고 지팡이를 짚었으며 창이 좁은 중절모를 쓰고 왔다. 알고 보니 그는 청년단의 단장인 유진산 씨였다. 우리는 유 단장에게 농담 삼아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백두산이고 제일 아름다운 산은 금강산인데 그러면 제일 못된 산은 무엇이요, 라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유진산이요” 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반도호텔을 빼앗긴 선친은 미군정청의 배려로 영등포에 있는 조선타이어 공장(구 한국타이어)의 관리인이 되셨고 을지로로 이사 온 후에도 그 일을 계속해서 맡아 하셨다. 그리고 그 공장에는 김태길 씨가 고문으로 있었는데 그의 동생인 김태선(전 서울시장) 씨가 당시 경무부(부장은 조병옥)의 수사국장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어 타이어가 팔리지 않아 공장의 경영이 좋지 않았으므로 선친께서는 고심 끝에 특유의 신경영 개념을 도입하여 타이어를 바퀴로 낀 마차를 생각해내시었다. 이리하여 한때 서울 거리에는 나무바퀴 대신 타이어를 달은 마차가 등장하여 사람들의 화재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타이어를 팔아 보겠다는 것이 선친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태길 씨는 이것을 트집 잡아 선친을 고발하고 자기가 그 공장의 관리인이 되려고 흉계를 부린 것이다. 끝내 1947년 가을경 선친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고 그 다음날 알아보니 수사국 형사에게 연행되어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곧 수사국장 별실에서 선친을 만나고 나온 후 경무부차장 최경진 씨를 찾아갔다. 최 차장은 과거 나의 고문 선배였고 최필립 씨의 부친이 되는 분인데 그분이 직접 선친을 곧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수사국에 가니 담당 형사는 지금은 토요일 오후라 석방 절차를 밟을 수가 없어 월요일이 되어야 풀려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어머님에게 알리고 며칠을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저녁이 되면서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였다. 선친께서 비 내리는 음산한 유치장 안에서 쭈구리고 계실 생각을 하니 나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성북동에 있을 때에 배웠던 점복이 생각났다. 그래서 곧 점을 쳐 보았더니 바로 그날로 선친께서 자유의 몸이 되신다는 점괘가 나왔다.

형사의 말과는 전혀 달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소리가 들리면서 선친이 비를 맞으며 돌아 오셨다. 담당 형사가 어차피 석방해 드릴 텐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하면서 찦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배운 점이 처음으로 맞는 순간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선친은 그 공장의 관리인 직을 그만 두었다.

1948년 2월경 평양고등보통학교 4년 후배 한춘섭 군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한근조 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당시 고려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있었는데 유진오 씨가 나를 찾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나도 대학 선배인 유 선생을 한번 만나고 싶었던 터에 그를 따라 청량리로 갔다. 유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맞아 주었고 그 자리에는 대학 동기생인 박재섭 군도 있었다. 유 선생은 손수 커피를 끓여 주시면서 우리보고 작년에 김성수 씨가 만든 고려대학교에 와서 교수직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 한근조 (1895-1972)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캡쳐

대학교수라는 자리는 감히 상상도 못할 때였으므로 우리가 어떻게 대학교수가 될 수가 있겠냐고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였다. 그랬더니 유 선생은 약 한 시간가량 편안하게 대화를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이 신중하게 해보겠다고 하자 유 선생은 즉석에서 강의 시간표를 내 놓으면서 과목을 하나씩 선택하라고 말하였다. 그 자리에서 내가 형법(Criminal Law)을 선택하자 이 과목은 이미 보성전문 출신 심호상이란 분에게 주기로 되어 있다고 하여 다시 행정법(Administrative Law)을 하겠다고 하였다.

유 선생은 곧 연필로 내 이름을 써 넣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이것도 며칠 전 이건호 씨의 소개로 변우창이란 분에게 주기로 약속하였으니 상법(Business Law)을 해보라고 권유하였다. 한편 박재섭 군은 경제학을 맡고 싶다고 했으나 정법대학에서는 경제학교수가 따로 없으니 법학 과목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 유 선생의 일관된 대답이었다.

당분간 침묵이 지나가고 드디어 나는 국제법(International Law)을 염두에 두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박 군이 나보다 0.5초 정도 빠르게 국제법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이 과목도 결국 박 군이 맡게 되었다. 유 선생은 나에게 재차 상법을 권하였으나 국제사법(International Public Law)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박 군은 나중에 정년퇴직 할 때까지 평생 동안 고려대학교의 국제법 교수로 일관하였고 나의 전공과목은 한 학기 뒤에 뜻하지 않게 변경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의 평생운명이 한순간에 결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한근조 선생이 유 선생에게 나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유 선생 말씀이 황 선생은 제국대학 법학과를 나오고 고문까지 합격한 사람이라 법학을 할 사람이지 동양사는 말도 안 되니 유 선생에게 달라고 하고는 한 선생의 둘째 아드님인 한춘섭 교수를 나에게 보냈던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유진오 선생은 나의 운명을 결정해 주신 평생의 은인이 되었고 유 선생도 나를 보람 있는 후배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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