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교수 (37회)
  제6장 해방 후 사회생활

고려대학교에서 나는 연구실 하나를 단독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교수 수효가 늘어나자 두 교수가 연구실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영문과 이인수 교수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영문학계의 대표적 학자였고 나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내가 대학예과 시절에 블리스(R. H. Blyth)라는 영국인 교수가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그 학교의 영어 담당인 후지이 교수가 런던대학에서 알게 되어 서울로 데려왔으며 영국인 교수 부인도 함께 와 있었다. 이때 서울에서 열린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영어웅변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블리스 부부는 이인수라는 학생의 영어 실력이 대단함을 발견하였다. 이 학생은 후에 경성고등 상업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영국인 부부의 이군에 대한 사랑은 더 해져서 드디어 블리스 교수의 부인은 이 군을 데리고 영국으로 가 버렸고 끝내 블리스 교수와는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블리스 교수는 충무로 남쪽에 있는 히라다 백화점에서 일하던 일본인 여점원과 결혼하게 된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에 블리스는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그리고 이 군은 영문학의 대가가 되어 해방 된 조국으로 돌아와 고려대학교 교수가 된 것이다. 이 교수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여름방학 무렵 경동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셋째 동생 돈이가 와서 세익스피어 전집을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고려대학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았더니 이인수 교수가 빌려 갔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교수에게 부탁하여 그 전집을 빌려 동생에게 주었다. 8월 말이 되어 방학이 끝날 무렵 동생은 그 전집을 다시 가져왔다.

그 책들을 돌려받은 이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세익스피어의 문장은 영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읽기 힘든데 동생 되시는 분이 읽어서 얼마나 이해했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생의 말로는 단어 2개는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하길래 그대로 전하였더니 놀라운 일이라면서 세익스피어 전집을 다 읽고 모를 말이 두 개 뿐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였다. 그만큼 내 동생 돈의 영어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후 돈은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과 독서를 통한 해박한 지식 때문에 박정희 정부에서 무역협회의 대외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그 후 6.25 전쟁이 터지고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이 교수를 끌어내어 영어방송을 시켰다. 이 교수의 유창한 영어 실력과 정확한 발음은 공산군의 외국어 선전에 많은 효과를 가져왔다. 9.28 서울 수복이 되자 이 교수는 곧 체포되었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 되었다. 부산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있던 유진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명운동을 하였다. 드디어 군 책임자의 허락을 얻어낸 유 선생이 이 교수가 잡혀있는 부대를 찾아갔으나 이미 사형선고가 집행되어 아까운 사람만 죽었다고 개탄하면서 유 선생은 허탈하게 돌아왔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고 이 교수의 부인이 남편의 무고함을 진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녔다. 이 교수는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강압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있던 이 교수 부인의 진정 행각은 신문지상에서 보도된 일도 있다. 이인수 교수의 신분이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이 씨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뛰어나게 영어를 잘 하였다는 것이 죄가 되어 30대 초반의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주교동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소의 돈을 장만하여 묵정동(지금의 앰배서더 호텔자리)에 있는 공동주택에 방 하나를 얻어 이사하였다. 이 일대는 일제 때 신마찌라고 부르던 곳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다니던 곳이다. 방이 커서 살 것만 같았다.

1949년 말의 일이었다. 이때 나는 공업문화사의 변경걸 사장(양문사 전신)을 같은 함경도 사람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한태연교수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변 사장과 교섭하여 법정총서라는 전집을 내기로 하였다.

나는 부지런히 뛰어 다니면서 전 20권의 저자를 확정시켰고 나도 두 권을 맡기로 하였다. 제일 먼저 나온 책이 나의 국제사법이고 뒤이어 김경수 교수의 정치사, 박일경 교수의 헌법, 김안진 (6.25 때에 월북)교수의 민법 그리고 주유순(6.25때 월북)교수의 상법 등이 나왔다. 특히 박일경 씨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국민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을 위하여 프린트로 만든 헌법 강의안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 박일경 (1920-1994) (사진출처 / 대통령 기록관)

헌법이 제정되자 제일 먼저 교과서를 쓴 분은 유진오 선생이었지만 박 교수는 일본이 처음 제국헌법을 만들고 난 다음 이를 축조해석하기 위해 이등박문이 헌법의해라는 해설서를 제작한 것을 흉내 내어 (역시 축조로 헌법을 해석한) 헌법 해석서를 내놓은 것인데 박 교수의 강의안은 체계적으로 헌법이론을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었다.

그 강의안 한부를 손에 넣은 나는 이것을 출판사에 넘겨 책으로 나오게 하겠다고 하였고 박 교수는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나중에 내 뜻을 받아들여 햇빛을 본 것이 위의 헌법이었다. 내가 강하게 밀고나간 것에 대해 박 교수는 나중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1949년 말 독일의 유명한 법철학자 라드부르흐가 돌아 가셨다.

1949년 말 겨울방학에 나는 정법총서의 하나로 예정된 법철학을 쓰기로 하였다.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방 한구석에서 집필을 하였는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을 먹고 그 자리에서 펜을 들어 하루 종일 글을 쓰다가 밤 11시경이 되면 약주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잠에 드는 식으로 계속되었다.

원고는 19일 만에 탈고하였고 이 책에서 나는 공산주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이 출판된 것은 1950년 4월이었고 그리고 두 달 후 6.25 전쟁이 일어나 3일 만에 공산군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책방마다 공산주의를 공격한 나의 책이 꽂혀 있었으므로 나는 잡혀가지 않을까 매우 불안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서울의 책들을 검색할 겨를도 없이 3개월 만에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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