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피난 (41회)
  제7장 한국전쟁

수복이 되어 다시 대학에 나가 밀린 봉급을 타왔고 또 오래간 만에 지인들도 만났다.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소위 강 건너 도망갔던 도강파와 서울에 있었던 잔류파의 갈등이 있기도 하였다. 서울에 남은 사람에 대해서는 혹시 공산군에 협력한 사람이 있지 않나 해서 피난갔던 사람에게 의심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다소의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위 잔류파의 대표 격인 김순식 학장의 과단성 있는 설득에 의해 이 문제는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국군은 계속해서 북상하였고 우리들은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매일 같이 명동에서 만나 술자리를 함께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준장(전 서울법대 학장)에게 부탁하여 평양에 가서 나의 장서를 가져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리저리 뛰어 다닌 끝에 대체로 12월 중순에 군용기편으로 평양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내락도 받아 내었다. 그러나 국군이 압록강의 초산을 점령하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사태는 돌변하였다. UN군은 후퇴하였고 평양은 다시 그들에게 빼앗겼으며 중공군은 계속 남하하였다.

나는 가족들을 부산으로 보내고 혼자라도 남아 중공군과 싸울 결심을 하였다. 영준의 외삼촌 황세봉 대위가 트럭 1대를 징발하여 주었으므로 그 차에 쌀과 먹을 것을 실어 부산으로 보내도록 해 놓고는 효자동에 있는 평안남도 도청으로 갔다. 가서 증명서를 받아 국방부에 신고하고 총기를 얻어 중공군과 싸울 판이었다. 조국강토에 중공 오랑캐가 침입해 온 것을 생각하니 피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청에 가도 직원이 자리에 있지 않아 증명서 교부가 늦어졌다.

12월 20일 아침에 다시 한 번 효자동에 갔으나 직원이 없으니 오후에 다시 오라는 말에 마침 중앙청 옆에 있는 식당에 가서 곰탕 한 그릇을 사 먹고 나왔다. 그런데 효자동 쪽으로 달려가던 지프차 한대가 내 앞에 급히 멎더니 그 차에서 집사람이 내렸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뛰어와서 붙잡고 애원하는 것이다.

ʻ가장을 사지로 보내고 애들만 데리고 피난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나도 처음에는 젊은 마음으로 당신의 뜻에 따랐지만 가다가 생각해 보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트럭이 지금 영등포에서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두말 말고 갑시다.ʼʼ 라고 매달리며 나를 못 가게 하였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나도 마음을 돌려 그 차를 타고 먼저 을지로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 같이 갈 것을 간청하였다. 부모님께서는 동생 인이가 돌아 올 거라고 기다려야 한다며 완고하게 서울에 남겠다는 것이다. 두 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부모님께 큰 절을 올리고 그 길로 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피난길 도중에 수원의 길가에서 밤길을 걸어가던 이건호교수 가족을 만나 동승시켰다. 트럭이 낡았기 때문에 부산까지 가는데 5일이나 걸렸다. 처남 황세봉 대위의 주선으로 부산 영도에 있는 도자기 공장의 사택에 방을 하나 얻었다. 부산시 봉래동2가 162번지. 여기서 우리 가족은 3년 동안이나 살았다. 한 많은 피난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대학교는 대구로 내려와 자리 잡았고 부산에는 연락사무소만 두었다. 영도에서 살림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매일 고대 연락사무소에 들렀다. 그런데 1951년 가을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아침 연락사무소에 가던 중 길가 집 처마 밑에서 어머님과 동생들이 서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공군의 서울 입성 직전에 마지막 기차로 부산에 도착하였고 갈 곳을 몰라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아버님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동시에 그 넓은 부산 바닥에서 이렇게 서로 우연히 만났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또한 그 간에 부모님께서 무척 고생하신 것을 생각하니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기만 하였다. 곧 그 분 들을 모시고 영도에 있는 집으로 갔다. 이리하여 이 집의 단칸방에서 당분간 온 가족이 기거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부모님과 동생들은 서면으로 이사 갔다.

1950년 초 나는 장난삼아 이승만 대통령의 당년 운수를 본 일이 있었다. 뽑은 괘는 수뢰둔(水雷屯)의 육과 삼(六·三)이었다. 둔괘는 전쟁을 상징하는 괘인데 구와 오(九·五)가 되어야 전쟁에 완전 승리하는 것이며 육, 삼(六·三)은 아직 거기에 까지 미치지 못하는 상태이다. 주역에서는 이 육, 삼에 관하여 물 건너에 있는 적군을 치기 위하여 물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직 그 물을 건너지 못한 상태로 보고 있다.
 
▲ 1950. 8. 대구,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내고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말 할 때마다 이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분이 금년에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 가라고 처음에 생각하였다. 그런데 9.28 수복 후에 국군이 계속 북상하여 혜산진 초산까지 도달하자 통일이 곧 눈앞에 다가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뽑은 괘에 의하면 아직 통일은 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자 중공군이 참전하였고 UN군은 후퇴하였으며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나는 트럭을 타고 남으로 피난을 가면서 지난번에 내가 뽑은 괘를 곰곰이 생각하며 주역의 오묘한 이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부산에 피난 와서 얼마 후 나는 해군에 취직하였다. 당시 해군 총참모장은 손원일 제독이었고 김성삼 준장이 해군본부 법무감으로 있었다. 그런데 해군에서는 영도다리 옆에 있던 법무감실에 방 하나를 만들어 유진오, 이희봉, 이건호, 박재섭과 나 5인으로 법제위원회를 조직하여 그곳에서 일하게 하였다. 해군에 관계되는 필요한 법령을 연구하고 준비 한다는 것이 명목이었으나 사실은 피난 내려온 지식인들을 위한 복지후생의 뜻이 더 강했다.

나는 고려대학과 해군의 두 곳에서 봉급을 받았고 특히 해군에서 주는 배급물자는 풍부하였다. 그래서 내 생활도 어려운 가운데 쥐꼬리 만한 여유가 생겼고 자연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자주 술도 마실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뜻하지 않게 돈이 조금 생기자 가족들 생각이 나서 국제시장에 들러 미제 고기 깡통을 하나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모두가 잘 먹었고 특히 대유가 많이 먹었다. 육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동안 못 먹은 탓인지 그날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그는 기운차게 뛰어 놀면서 출근하는 나에게 큰소리로 인사까지 하였다.

나는 종일토록 시내에서 일을 하고는 저녁이 되어 집에 가려고 영도다리를 막 지나려고 하는데 처제가 나에게 뛰어 와서는 대유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급히 뛰어 가보니 병원에는 아내와 외삼촌 선만이 환자를 돌보고 있었지만 아이는 이미 정신이 없었고 얼마 안 있어 애처롭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의사 말로는 지역이 바뀌고 먹는 물이 바뀌면 생기는 일종의 풍토병으로 일반 약으로는 치료가 힘들다는 것이다. 간혹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기도 하는 병인데 자기 같은 양의사들은 잘 알지 못하는 괴질이라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무슨 날 벼락인가 말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고 보니 이 비통한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피난살이의 설움과 뒤얽힌 그날의 아픔은 우리 내외의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충격을 주었고 그 다음날 우리는 통곡 속에 죽은 아이를 영도산 위에 묻고 왔다. 대유의 죽음으로 우리 두 내외는 자주 영도산을 찾았고 산 중턱에 있는 법화사라는 절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우리는 죽음이라는 엄연하고 처절한 사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마음의 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불교신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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