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망이불사(身亡而不死) (99회)
  제14장 공직생활2

1월 18일. 환상은 완전히 없어졌고 대신 잔소리가 많아졌다. 요도의 하혈이 두 번 있었다. 병원 측으로부터 퇴원해 달라는 요구가 심하였다.

1월 19일 피소변을 누었다. 피 검사를 해보았더니 암 세포가 전이되었기 때문이며 말기현상이라는 것이 주치의의 말이다. 환자의 요청이 심하여 밤에 퇴원하였다. 병원을 나올 때 그는 품위를 지키려고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았고 명륜동 집에 돌아와서는 크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1월 20일 아침에 호흡곤란으로 큰 소동을 벌였다. 순천향 병원에서 급히 기구를 옮겨와 산소호흡을 시켰더니 안정되었다. 성제원 원장 김정제 박사가 와서 보시고는 아주 중태라고 말하고 갔다. 한약 2첩을 보내 주셨으나 먹이지는 않았다.

1월 21일. 정신은 약간 똘똘해 졌으나 도무지 기운이 없다. 효자동에 있는 김홍기 한의사가 와서 진맥하였다. 한약 1첩을 지어 보내 그것을 먹여 보았으나 잘 먹지 못하였다.

1월 22일. 자기 힘으로 가래침을 뱉을 수 있었고 대소변을 아주 많이 보았다. 너무나 탈진해 있어 밤에 알부민 주사를 맞았다.

1월 23일. 혈압은 정상. 정신은 똘똘. 그러나 도무지 기운이 없다. 김홍기 씨의 한약 1첩을 또 먹여 보았으나 약 먹을 기운도 없다.

1월 24일.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남편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내가 한 숟가락 떠먹고 그의 입에 한 숟가락 넣어주고 하는 식으로 죽 한 그릇을 먹었다. 결국 이것은 그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오후에 김홍기 씨가 와서 맥을 짚어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말하고 갔다.

1월 25일. 상황이 심상치 않아 아침 일찍 영준을 통하여 의사 김재규 씨를 불렀다. 혈압이 90이하로 떨어져 임종이 가까왔으니 가족들을 모두 부르라는 의사의 말이다. 우이동 도선사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를 올리고 있던 남채를 불러왔고 영채와 영준도 모두 같이 모였다. 의사는 내실에서 나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드디어 11시 20분에 5남매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선은 조용히 숨을 거두며 생을 마감하였다. 그들은 숨을 거두는 어머니를 붙잡고 일심으로 염불하였다. 거실에서 백성욱 박사와 함께 앉아 있던 나는 애들의 침착성에 감탄하였다. 그 어머니에 그 자식들인 것이다. 얼마 후에 딸들이 거실로 나와 나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무슨 병이었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비로소 병명이 폐암이었다고 말하였다.

1월 26일. 천명 이상의 조객이 다녀갔다. 조의금과 조화는 일체 거절하였다.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하여 친서와 조위금 150만원을 보내 주었다.

1월 27일. 10시에 명륜동 자택에서 발인. 10시 30분에 조계사에서 전국 불교신도회장으로 영결식. 12시 30분 벽제에서 화장. 오후 3시 한강 천호대교 상류에서 영준이가 유골의 일부를 살포. 5시에 칠보사에서 혼혼식.

2월 1일. 나머지 유골을 웅, 무궁화와 보성스님이 동해 낙산사로 운반하여 간단한 식을 거친 다음에 배를 타고 앞 바다로 나가 바다에 살포하였다. 지금 낙산사에 세워진 해수관세음보살상 바로 앞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한 바탕 소란스런 행차가 지나간 뒤
거리는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떠나간 그 쪽으로 좇아 바라보니
북악산 백운봉이 새삼 수려하고나.

남채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의 일생은 마치 써커스단 행렬과 같았어요.”

영결식장에서 종정 이서옹 스님은 법어를 통하여 왔으니 오지 않았고, 갔으니 가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숨을 거두고 있는 어머니를 붙들고 자식들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 나는 비관론과 낙관론 중에서 그 하나를 택하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이러한 두 입장을 모두 초극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갔다. 물론 인지상정이라 어찌할 수 없이 비과학적인 낙관론에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보니 ‘이선은 죽었으나 대법선은 죽지 않았다. 다시 말해 몸은 없어졌으나 죽지는 않았다. (身亡而不死)라고 자위할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손주들 윤상과 서림은 일체 환자에게 접근시키지 않았고 임신 중인 며느리에게도 자중하게 하였다. 집안의 명맥은 영원히 이어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개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해 애를 쓰면서 간병한 무궁화, 남채, 옥채 세 딸들에게도 부처님의 축복이 내려지기를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이상은 그 동안 수시로 메모해 놓았던 것을 1976년 2월 4일에 정리하여 쓴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다음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해 왔는가는 취현기에 적혀있다.

 
  이선의 투병과 가족의 상심 (98회)
  대만여행 (100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