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교부 시절 겪은 일들 (106회)
  제15장 공직생활3

자연보호운동
서울 근교의 산은 공휴일만 되면 쓰레기로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12월 14일에 장학실장을 불러 인근 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전국의 등산로와 관광지를 정화하는 운동을 벌이도록 명하였다.

이리하여 얼마 동안을 이렇게 추진해 보았으나 문교부장관의 힘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올릴 수가 없었다. 이 운동은 나중에 변질되어 대통령의 자연보호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대통령이 직접 산에 올라가 쓰레기를 줍기까지 하였으나 나중에 박대통령이 서거하고 이 운동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울산 공과대학
하루는 대통령이 나에게 물었다.

“이후락 군이 아직도 울산공대를 맡아 하고 있습니까. 이후락 군한테 당분간 쉬라고 하십시오.”
“후임은 누가 좋겠습니까?”
“장관이 알아서 정하시요. 정주영 씨도 무방할 것이요.”

12월 20일 나는 정주영 씨를 불러서 울산공대를 맡으라고 말하였다. 장관이 이후락 씨의 양해만 얻어주면 맡겠다고 그는 대답하였다.

다음해 1977년 1월 5일에 나는 조성옥 문교부 차관을 이후락 씨에게 보내 교섭하여 울산공대의 재단이사장 자리를 내놓겠다는 언약을 받아왔다. 이리하여 그 후부터 이 대학은 정주 영씨가 맡아서 경영해 오고 있다.

분교 문제
매년 12월이면 다음해에 뽑을 전국의 대학생 입학정원을 문교부에서 발표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정부방침은 서울에 있는 대학은 한 명도 증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균관대학교의 수원분교와 단국대학교의 천안분교는 대폭적으로 증원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대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성대는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수도권 속에는 수원도 포함되어 수도권 문제를 전담하는 장동형 제1무임소 장관은 성대의 수원 분교에는 한명도 증원할 수 없다는 고집이었다. 이미 수원에는 거대하게 학교시설을 지어 놓았는데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따져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최규하 총리도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할 수 없어 나는 12월 16일에 대통령을 찾아갔다.

“내가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에 지방 분산의 정부시책에 따라 수원에 분교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부지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후임 총장이 이 땅에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설을 신축하여 내년 새 학기부터는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수도권은 서울특별시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수원까지 확대되어 성대의 수원분교가 지금은 수도권 안이 되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장장 관과 최 총리는 성대 분교에 한명도 증원해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균관대학으로서는 정부시책에 순응한다고 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으니 구제해 줄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문의하였다.

그러자 대통령은 “문교부 방침대로 하시요. 대폭적으로 정원을 늘려 주시요.”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수원분교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300여명이 증원되었다. 단국대학교의 천안분교에도 이 정도의 증원이 허용되었다. 두 대학에는 뜻밖의 큰 경사가 났던 것이다. 다음해도 이 두 대학은 이 만큼의 증원이 있었고 이리하여 두 대학은 재정적으로 아주 풍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극제가 되어 고대, 연대 기타 다른 대학에서도 분교를 두게 되었다.

1977년 (61세)이 되었다.

정독 도서관 개관
1월 4일 10시에 중앙청에서 시무식이 있었고 10시 40분 사무관급 이상 문교부 직원의 신년하례를 받았다. 이어 기자들과 다과회를 가지고 이 자리에서 문교정책에 관한 나의 기본 입장을 밝혔다. 오후 2시에는 구 경기고교 자리에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세운 정독 도서관의 개관식을 가졌다.
 
▲ 1977년 1월 4일 종로구 화동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국내 최대규모의 도서관인 정독도서관이 개관되었다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독‧불사전 제작지원
1월4일에 불문학회장 정병희 교수와 독문학회장 지명렬 교수를 장관실로 불러 제2외국어 교육에 관한 애로사항을 물었고 곧 이어 플라자호텔에서 오찬을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사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나는 도와주겠다는 언질을 주었다.

1월26일에 그들은 나를 찾아와 학회활동 보조요청서를 제출하였다. 한독사전 원고작성(22개월) 보조금으로 2천1백만 원, 불문법사전 원고 작성(24개월) 보조금으로 1천5백만 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에 대한 문교부의 지원으로 1978년에 삼화출판사에서 불어학사전과 1982년에 민중서림에서 엣센스 한독사전이 각각 출판되었다. 교수출신의 장관이 학계에 보내는 자그마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1월 14일 윤상이 상명국민학교에 추첨으로 입학하였다.

정신문화연구원
박 대통령은 임진난 때에 퇴계학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꾸가와 막부초기에 정착하여 그것이 모체가 되어 명치유신의 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것을 기초로 명치천황의 교육칙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국학의 연구발전을 촉진시킬 특수기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정상천 수석비서와 나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학의 연구가 아직 충분치 못하므로 자료수집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고 반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입소시켜 연구훈련을 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 수석의 입장이었다.

나는 국학연구 자체를 위주로 하는 입장이었고 정 수석은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켜 정치적 성과를 올리자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대립은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계속되는 것 같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의 밑에서는 후자의 입장이 우세한 편이며 따라서 오늘날 이 기관은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튼 이 기관의 명칭을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정하기로 하고 처음에는 이천에 있는 UNESCO훈련원을 쓰기로 하였으나 나중에 그곳이 불편하다고 하여 달리 장소를 찾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1월 20일에 직접 판교에 있는 남서울 골프장 북쪽을 찾아가 거기에 부지를 잡았는데 후에 이 자리에는 거대한 연구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박 대통령의 애국심이 이 자리에서 꽃이 피게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77년 정기국회에서 이 연구원을 위한 예산 60억 원이 제출되었는데 전액소멸을 주장하는 신민당 의원들과 싸워가면서 간신히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나는 문교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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