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갈등과 충효사상 (108회)
  제16장 공직생활4

문교부 인사

법무부에서 문교부로 옮겨와 보니 전임 장관 유기춘 씨의 인사 스타일이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전라도 출신을 대거 등용하였고 경상도 출신은 배척하여 영남 측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교부로 온지 약 1개월 동안 나는 서서히 새로운 인사구상을 하였다. 인사에 대한 불만이 심해 이대로는 문교부의 일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라도 편의 문교부와 경상도 편의 청와대 비서진이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니 어느 안건 하나 제대로 처리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충남대의 박 총장의 임기가 만료되어 그를 연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나는 박 총장을 연임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1월 31일 이 문제가 청와대에서 거론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박 총장을 연임시키지 말라고 말하였다. “자기 마누라에게 자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주고 총장 공관에서 수여식을 가진 모양인데 이런 사람을 어떻게 총장 자격이 있다고 하겠는가.”라는 것이 대통령의 반대 이유였다.

이 자리에서 나는 문교차관 조성옥을 충남대 총장으로, 그리고 신설되는 한국 체육대학 학장에 한양대 체육대학장인 유근석 박사를 추천하여 각각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는 청와대에 있는 장인숙 비서를 문교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처음에는 “안 돼. 청와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가면 안 돼.”라고 하다가 “장관이 필요한 사람인 모양이니 그럼 데려가시요.”라고 하였고 옆에 있던 정 수석은 “잘 하셨습니다.”라고 좋아하였다.

장인숙은 본래 정 수석과 같은 영남출신으로 문교부의 고등교육국장으로 있었다. 그런데 유기춘 전장관은 장 국장을 국사편찬위원회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이대순(전남 고흥출신)군을 앉혔다. 그러자 청와대의 정 수석이 장인숙을 청와대 비서로 끌어갔다. 다소 감정적으로 된 인사였는데 그때부터 장 비서는 문교부에서 올라오는 공문에 대하여 까다롭게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장인숙을 1계급 높여서 문교부로 다시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청와대를 나온 나는 그 길로 총리실을 찾아 문교부 차관의 후임으로 고광득 관리관(중앙교육원장)을 추천하기로 최규하 총리와 합의를 보고 2월 1일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리하여 2월 3일 문교부의 인사안을 정식으로 제청하였는데 이상규 기획관리실장을 중앙교육원장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내용이었다.
 
▲ 1974년 필자가 법무장관 임명될 때 함께 임명된 유기춘 문교장관(오른쪽) / 호남출신인 유기춘 장관이 임명되면서 문교부 내에 영호남 인사를 둘러싸고 호남유기춘 장관과 청와대의 영남출신인 정상천 교육수석 간의 갈등이 심했다

이대순 교육국장은 그대로 두었는데 이에 대하여 영남 측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고 차관이 강원도 출신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는데 그러한 그를 내가 차관으로 등용하자 그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여하튼 우리 정부 안에서도 지방색은 큰 고질병이라고 하겠다. 이상규, 장인숙, 정태수 사회교육 국장은 나중에 문교차관이 되었고 이대순은 전두환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이 되었다.

충효사상

2월4일 오전에 대통령은 법무부를 연두 순시하고 그리고 문교부 장관실에서 오찬을 한 후 오후에 문교부를 연두 순시하였다. 그런데 오찬 때에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이선중 법무장관의 말을 들으니 황 장관은 법무부에 있을 때에 사형수를 한명도 집행하지 않았고 이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그 밀린 사형수를 다 처리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문세광을 처리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대화는 이것으로 더 계속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상황실에서 77년도의 문교부 시정방침을 보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는 충.효를 시정의 기본 방침으로 하겠다고 강조하였고 이에 대하여 대통령은 크게 찬성하였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나 옛날의 충효는 그 기본정신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이 둘을 분리하여 충효를 봉건적이라고 배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은 하나이므로 충효를 강조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실정에 맞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대통령의 딸 박근혜양이 새마음운동이라는 것을 벌이면서 충ㆍ효ㆍ예를 구호로 들고 나왔다. 동시에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박 양을 등에 업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충ㆍ효ㆍ예를 떠들어댔다. 그러한 관계로 모처럼의 나의 시정방침이 퇴색되고 말았다.

나는 7월 22일에 장학관들을 모아 놓고 충효에 관한 나의 장학지침을 시달하는 등 안간힘을 써보기도 하였다. 8월 3일에는 청주에 있는 대농 강당에서 중등교육협의회가 열려 여기에 참석한 전국의 중고교장 1,300명에게 충효교육에 관한 강연을 75분 동안이나 하였다.

나는 특히 일등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도록 교육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충효에서 일등국민에로 그 중점을 옮겨 어릴 때부터 일등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도록 해야만 우리나라는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는데 교장선생님들의 많은 공감을 받았다. 그러나 나의 문교부장관 재임기간이 짧았던 만큼 나의 정신운동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숙명여대 총장 문제 (107회)
  편수국 사건과 교복자율화 (109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