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총장 임명 건 등 박 대통령의 의중 (111회)
  제16장 공직생활4

고려대 총장 임명 승인 건

차락훈 씨가 고려대 총장을 그만두기로 한 얼마 후에 그 대학의 재단이사장 이활 씨와 동아일보의 김상만 씨가 나를 찾아와 후임으로는 김상협 씨를 생각하고 있다고 암시하고 갔다. 김상협 씨는 고려대 총장으로 있을 때 학생데모를 잘 처리하지 않았다고 당시 유기춘 장관에 의해 그 자리를 내놓도록 강요당한 일이 있었다.

7월 6일 청와대에 간 길에 나는 차 총장의 후임으로 김상협 씨가 어떻겠는가 라고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전라도 사람이 고려대학을 창립했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만이 그 대학의 총장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등 여러 가지 격한 말들을 하면서 정재관 교수를 추천하는 눈치를 보였다.

나는 대통령의 이런 예기를 그대로 고려대 이사진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문교부 내의 공기가 김상협 씨에게 매우 불리해서 이런 상황에 김상협 씨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가 없다고만 말하였다. 그러나 그분들은 “황 장관은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우니 잘 말씀드리면 될 것이 아니냐. 지금 고려대의 재정형편이 엉망인데 이 문제는 김상협 씨가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계속해서 졸라댔다.

그런데 7월 13일에는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황 장관은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과 친해 매일 만나고 있으며 경성제대 동창인 홍익대 총장 이항령 씨를 고대 총장자리에 앉히려고 책동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잘 말씀드리면 김상협 씨에 대한 대통령의 오해도 풀릴 것인데 황 장관은 이런 이유로 김 씨를 반대하고 자기 대학 동창을 고대에 보내려고 하고 있다.”는 내용의 가십 기사가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 진원이 어디인가는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다. 그 후에도 이활 씨 등이 자주 찾아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갔으나 그때 마다 나는 대통령의 말씀만은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8월 말에 제네바 유네스코 회의에 가야하므로 고려대 문제는 그 이전에 해결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김재규 중정부장을 찾아가 고대 학생들과 관련인사들이 후임 총장으로 김상협 씨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설득시켜 달라고 하였다.

8월 12일 오후 5시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만나니 대뜸 고대 총장에 김상협 씨를 임명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유혁인 정무제1수석 비서가 옆에 있었다. 그는 말참견을 하면서 그냥 승인 하지 말고 다시는 정부 시책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나는 이렇게 조건부 승인을 받고서야 나올 수가 있었는데 그 후 8월 15일 나는 외교구락부에서 민관식, 김상협 씨와 점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그 간의 소식을 전해 주면서도 서약서에 관한 말만은 하지 않았다. 8월 18일 드디어 김상협 씨의 고려대 총장 임명승인 문서에 결재하였다.
 
▲ 김상협 고려대 신임총장 인터뷰 [동아일보 1977. 9.10.)

전문대학제

당시에는 전문학교와 초급대학이 각각 2년제로 있었으나 이 두 학교가 모두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그 두 제도를 통합하기로 하고서 전문대학이라는 것을 구상하였다. 이리하여 7월 15일에는 총리에게 전문학교 개혁안에 대한 브리핑을 하였다.

그리고 7월 21일에는 청와대에서도 같은 내용의 브리핑을 하여 대통령으로 부터 “그대로 시행 하시요. 전문대학이라는 명칭에 학생들은 좋아 하겠구먼.”이라고 승인을 받았다. 7월 22일 신문 보도에 이어 7월 23일 여당의원들에게도 브리핑하여 전문대학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재미 정치학자 초청세미나

총리실에서 돈을 내어 1년에 한 번씩 재미 한국인 정치학교수를 불러 세미나를 갖기로 하고 1977년 8월 9일 개회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 가보니 국내외교수가 절반씩 섞여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나의 서울대 제자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치사를 하였다.

즉,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여 배운 이론과 한국의 현실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의 현실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하지 말고 한국의 실정을 깊이 인식하고 서로 논의해서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

그리고 저녁에는 그들을 타워호텔로 초청하여 리셉션을 가졌다. 그들 중에는 내가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나를 안내한 신인섭 군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언동이 최규하 총리를 기분 나쁘게 한 모양인지 최 총리는 앞으로 다시는 그들을 초청하지 않겠다고 말해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자교육 문제

초등학교에서는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정부의 방침 이었다. 정부에서 작성하는 공문이나 브리핑에서는 한자를 많이 쓰면서도 학생들에게는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이 이미 확고하여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8월 16일 저녁 관훈 클럽의 초청으로 코리아나 호텔에서 강연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막내딸이 금년 봄에 서울대를 졸업하였는데 그는 일간지에 나오는 한자를 잘 읽지 못합니다. 이 나라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이 그 나라의 일간지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발언은 기자들의 많은 공감은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언질을 받았다. 한자 문제는 이미 정부방침이 되어 있어 손대기가 쉽지 않고 또 한글과 같은 훌륭한 문자가 있어 한글 전용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나의 전공도 아닌 한자문제를 가지고 대통령과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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