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과 1979년 (115회)
  제17장 인생의 정리

재혼과 딸들의 출가

1978년은 집에서 쉬는 한해였다. 독서와 집필도 하며 그리고 골프로 세월을 보냈다.

1월 27일 삼현학을 쓰기 시작하여 4월13일에 끝냈다. 이 책은 1979년 2월3일 에 서문문고에서 출판되었다.

2월 2일 칠보사에서 이선의 2주기 불사가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딸들에게 탈상을 하였으니 모두들 결혼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 1978년 펴낸 삼현학    
 4월 11일 형법각론(5정판)을 쓰기 시작하여 5월23일에 끝났다. 이 책은 12월 20일에 방문사에서 발행하였다.

하루는 딸들이 모두가 나에게 와서 하는 말이 “저희들이 먼저 시집을 갈 수가 없어요. 아빠가 혼자가 되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아빠가 먼저 재혼을 하신 다음에 저희들이 시집가렵니다.” 남채가 대표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이미 난정 김효수를 마음속으로 정하고 은밀히 난정에게 교섭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6월7일 외교구락부에서 김인홍 교수 부인 하 여사와 딸들을 배석시키고 효수와 첫 대면을 하였고 계속해서 그와 몇 차례 개별 접촉을 한 다음 7월 2일 많은 하객들을 모시고 구산 스님의 주례로 낙산장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는 7월25일 3일간 도고온천에 신혼여행 겸해서 다녀왔다.

난정이가 명륜동으로 시집오고 딸들의 결혼문제는 급진전되었다. 이리하여 8월 27일 인록(무궁화)은 신형식 건설부장관의 주례로 구경수와 결혼하였고, 9월 3일에는 남채가 이용희 통일원 장관 주례로 유영과 결혼하였으며, 9월 8일에는 옥채가 이해성씨의 외아들 덕주와 약혼하였다. 1주일을 간격으로 세 딸이 모두 처리된 것이다. 결혼식을 끝낸 남채는 9월10일에 영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9월 5일부터 성균관대에 강사로 나가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나의 성대출강은 한학기로 끝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 2월26일에 영채의 가족은 대전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김웅 팀의 노력으로 9월26일에는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였다. 핵무기 개발의 문턱까지 간 것이다.

박대통령 시해되다

1979년(63세)도 역시 집에서 쉬는 한 해였다.

나의 일상생활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었다. 2월 20일에 옥채가 이항령 홍익대 총장의 주례로 이덕주와 결혼하였다. 이제부터 명륜동 집에서는 나와 효수의 둘만이 살게 되었다. 옥채와 덕주는 8월 10일에 미국의 스탠퍼드로 유학차 떠났다.

2월 27일 자유중국의 사법행정부장 왕도연 박사가 한국에 왔다. 내가 대만에 갔을 때에 그분은 차장이었고 술을 참으로 좋아하였다. 이선중 씨와 함께 뉴 코리아에 모시고 나가 골프를 쳤다.

6월 18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나의 회갑기념 논문집 법철학과 형법의 증정식이 있었다. 신형식 장관이 비용을 마련하였고 심헌섭 교수가 편집 일을 맡아본 것이다. 식은 참으로 성대하였다.

7월 31일에서 8월 2일까지 효수와 함께 제주도에 가서 해수욕을 하였다.

6월 29일에 카터가 한국에 왔다. 주한미군 철수주장의 장본인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시해되었다. 궁정동에 있는 중정별관에서 가수 등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중정부장 김재규가 갑자기 권총을 꺼내들어 대통령을 시해하고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것이다.

이것으로 박정희 씨는 어이없게도 참담하게 험한 모습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국립묘지에 있는 육영수여사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10.26 사태라는 것이 이것인데 이때부터 우리의 정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2월 6일 최규하 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정국은 불안정하였으며 드디어 노태우 사단에 의한 총질사건이 발생하자(소위 12.12사건), 정치의 실권은 박대통령 밑에서 보안사령관을 하던 전두환 장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대통령 명 거역과 장관 직에서의 해임 (114회)
  1980년과 1981년 (1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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