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정에서 있은 일들_2 (73회)
  제11장 영어(囹圄)의 생활

10월 22일 제2회 공판이 있었다. 전번과 같이 많은 학생들이 방청석을 메웠고 밖에서는 경전차가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심판부의 세 사람이 들어와 앉자 검찰관 유 대위가 심문을 시작하였다. 피고인석에 앉아서 보더라도 유 대위가 매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음을 곧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ʻ황 교수님께 물어 보겠습니다.ʼ ʻ황 박사님께서는 그 때에 무엇을 하셨습니까.ʼ라는 식으로 묻다가 나중에 어느 정도 분위기가 안정된 다음에야 피고인의 생각은 어떠냐고 호칭을 바꾸었다. 심문하는 태도도 도무지 기운이 없었다.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기록대로 심문을 하면서 피고인은 그럴 목적으로 문제의 사설을 집필했나요 라고 물었고 내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면 그는 곧 순순히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하며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검찰관의 심문이 대충 끝나자 너무 싱겁게 끝났다고 생각했음인지 재판장이 보충심문을 하겠다고 나섰다. 허두에 그는 내가 문제의 사설을 읽어 보았더니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매우 반정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제하고는 법적문제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이미 굳어져 있던 분위기는 완화되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상당히 자유로운 기분으로 하게 되었다. 말을 해나가는 동안에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하던 버릇이 되살아나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가 학생에게 강의하듯 답변을 하고 말았다.

재판장인 대령은 화학을 전공한 기술 장교였으므로 이 정도로 친절히 설명해 주어야 될 것이라는 노파심에서 한 것이었지만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고 경비하던 헌병은 학생들에게 만일 계속 웃으면 모두 퇴장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재판장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그 후에 나에 대하여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재판장은 공판이 끝나기 전부터 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선언하기로 작정해 놓고 형기를 얼마로 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다고 한다.

사실심리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부터 유죄판결을 내리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지만 이날 공판정에서 피고인과 방청객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재판장으로서는 크게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판장의 이러한 태도는 나중에 검찰관 유 대위와의 사이의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재판장의 질문이 끝나자 변호인 김치열과 유무형씨가 차례로 나에게 질문하였다.

김 변호인은 이론적으로 질문을 하였고 유 변호인은 여러 가지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도록 유도하려고 애를 섰다. 특히 김 변호인은 기소장에서 나와 같은 헌법 학자라고 말한데 대하여 질문의 화살을 던졌다.

“황 교수님은 헌법학자이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형법학자입니다만 중앙정보부에서 아마 혼동을 한 모양입니다.”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리고 헌병이 또 조용하라고 제지하였다.
 
▲ (동아일보 1962. 10.22.)

김 변호인은 계속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혼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황 교수님이 헌법 학자라면 자기를 헌법심사위원에 위촉하지 않은데 대하여 불만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황 교수는 형법학자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촉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만을 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헌법 심의위원에 위촉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만을 품고 정부를 비방할 목적이라고 기소장에 지적한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으니 정부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 운운하는 특례법 제3조3의 구성요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기사 쪽을 바라보며) 이제 말한 것을 정확히 기록해 주십시요.”

김 변호인과 나와의 사이에 이러한 질문이 오가자 유 검찰관은 방청석 쪽에 앉아 있는 중앙정보부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며 “헌법학자가 아니라면 기소장 내용을 <나와 같은 법학자를> 이라고 고치면 되겠습니까?”라고 나에게 질문하였다. 나는 “헌법학자라면 불만을 품을 이유가 충분한 것이며 그저 법학자라고 해서는 그렇게 강한 의미를 가질 수 없기에 유 대위의 입장을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형법학자도 법학자이므로 그렇게 고쳐도 무방하다”고 답변하였다.

이것으로 사실신문은 끝나고 계속해서 증인신청 같은 것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심판부와 검찰 그리고 변호인 측은 이 사건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끌면서 최고회의로부터 정치적인 모종의 결정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제2회 공판은 이것으로써 폐정이 되었다.
 
3회 공판은 10월 31일에 역시 제1호 법정에서 열렸다. 그러나 법무사와 검찰 및 변호인이 사전에 타협을 한 결과 변호인 측으로부터 증인신문을 신청하였고 심판부에서 그것을 채택함으로써 약 10분 만에 공판은 끝났다. 이리하여 논설위원실에 나와 함께 있던 서석순 교수와 나의 연구실에 있는 심헌섭 군이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제4회 공판은 기일을 늦게 잡아 11월 21일에 열렸다. 오전에는 제3호 법정에서 서석순 교수에 대한 그리고 오후에는 제1호 법정에서 심헌섭 군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었다. 증인으로 불려나온 심 군이 공판정이 바뀐 줄을 모르고 제3호 법정으로 갔다가 오느라고 조금 늦은 것을 핑계 삼아 재판장은 공판을 무기 연기한다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퇴장해 버렸다.

뒤따라 나간 석 대위와 유 대위가 재판장을 붙들고 아무리 재판장이라도 법무사의 의견도 묻지 않고 멋대로 공판을 연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졌다. 그런데 이때 젊은 장교들의 언사가 다소 불손하였는지 재판장은 더욱 화가 나서 험악한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약 한 시간 정도 협박과 회유를 하여 그 대령을 간신히 다시 공판정으로 끌고 왔다. 젊은 검찰관 유 대위가 재판장인 대령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면서 “여보시요, 법학박사를 재판하기가 그리 쉬운 줄 아시요.”라고 고함까지 질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때 젊은 장교들은 재판장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증인심문은 검찰관과 변호인만이 하였고 재판장과 법무사는 시종 침묵을 지켰다. 서석순 박사는 내가 문제의 사설을 쓸 당시의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의 상황에 대하여 주로 진술하였고 그리고 심헌섭 군은 내가 그 사설을 쓰고 집에 돌아와서 어떠한 태도로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 받았다. 다음 공판은 12월 3일에 열리기로 되었다.

순서로 보아 이때는 검찰관의 구형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검찰관인 유 대위는 밖에서 빙빙 돌면서 공판정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안에서 그를 발견하고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였으나 끝내 그는 들어오지 않아 할 수 없이 그 공판은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사실 이 무렵에 최고회의에서는 나를 석방하기로 이미 방침을 세웠던 모양이며 그러한 움직임을 유 대위도 눈치 챘기 때문에 구형공판에 일부러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재판장은 유 대위를 붙들고 왜 공판정에 나오지 않느냐고 야단을 쳤고 이것 때문에 또 다시 시비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재판장을 갈아 치우려고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으나 최고회의 공기가 부드러워서 정치적으로 잘 해결될 것 같은 눈치가 보였으므로 그대로 두었다고 유 대위가 나중에 말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젊은 장교들의 애로와 고뇌를 십분 이해하며 지금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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