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방 (75회)
  제11장 영어(囹圄)의 생활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머리에 그리고 하는 것으로 보통은 자기가 생각하는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 내어 부른다. 그런데 그때에 나는 부처님이 아니라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불렀다. 관세음보살 마하살을 끝도 없이 부르면서 눈으로는 박정희 장군의 화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처님을 머리에 그리는 경우에는 그 순간만은 우리의 마음이 부처가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와 같이 염불을 하는 경우에 우리의 마음도 역시 부처의 마음과 같은 상태를 지속할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부처의 마음에서는 황산덕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랑하고 박정희라고 해서 특별히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 같이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박 장군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염불을 계속하여 비록 한때나마 나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으로 바뀌도록 하는 길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벽에서 약 1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정좌한 채 무한정이고 관세음보살 마하살을 불러댔다.

한 시간을 불렀는지 두 시간을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랜 동안 이와 같이 염불을 하니까 박 장군의 초상은 웃는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또는 성난 얼굴로 보이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화상으로 보였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마는 촉촉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고 얼굴과 몸은 화끈한 것 같았으며 박정희 장군의 화상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얼굴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정답게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저 담담한 심정으로 바라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감방 안에서의 나의 생활은 수도자의 그것과 별 다름이 없었다. 아침 4시에 기상하여 저녁 8시에 취침할 때까지 나의 일과는 냉수마찰, 운동, 좌선, 기도 및 독경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다. 초췌해 가던 얼굴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마음은 항상 희망과 기쁨으로 차 있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최고회의에서는 의견 대립이 있었던 모양이다. 김형욱, 홍종철, 길재호씨(소위 김.홍.길)를 중심으로 하는 세칭 강경파 사람들은 집행유예를 그리고 세칭 온건파라고 불리는 최고위원들은 선고유예를 주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나에게는 도무지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형무소 밖에 나와 있었고 출감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계획으로 꽉 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항상 계획 있는 생활을 하며 그리고 희망을 가지는 생활신조까지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는 여러 권의 법률서적을 들여보냈지만 나는 그것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동국 대학교에서 복사한 금강바라밀경 오가해만을 숙독하였다. 5인의 주해 중에서도 특히 야부의 것을 가장 즐겨 읽었다. 경의 귀절마다 선미가 넘쳐흐르는 한시로 풀이해 내려간 야부는 감방에 갇혀있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12월이 되었다. 기온은 영하 6도로 내려갔고 눈은 형무소 안의 뒤뜰을 하얗게 덮었다. 철창 사이로 내다보이는 이 광경은 빙설지옥 그대로였다. 담당 간수의 특별한 호의로 밤마다 더운물을 조금씩 마실 수가 있었으나 그 밖에는 배급되는 밥, 국과 물이 모두 차가웠다. 형무소에서는 10월초에 유리창을 갈아 끼우지만 그 후에 곧 그 유리가 깨져도 다음해 10월까지는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들어있던 27방의 유리는 갈아 낄 때 이미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고 처음에는 별로 추운 지 몰랐는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눈이 하얗게 덮이자 방안은 옥외와 조금도 다름없는 바깥이 되고 말았다. 이런 한냉 속에서 종일토록 웅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희망으로 불타 있었고 얼굴은 도리어 빨갛게 달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12월 7일이 되었다. 아침을 먹고 난 다음에 어쩐지 검찰청에 나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복도를 지나가던 안 부장을 찾아 유 대위가 부르지 않던가를 물어보았다. 안 부장은 잠간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딘가 갔다가 다시 와서 출정이라고 나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다른 죄수들과 함께 육군본부 검찰부로 가서 유 대위의 방으로 갔다. 이 방에 유 대위는 없었고 다른 장교들만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의미 있는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나를 향하여 “그동안 참으로 욕 많이 보셨습니다. 여기 오신지가 벌써 다섯 달 쯤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얼마쯤 있으니 아내와 영준이가 뛰어왔고 그리고 영채와 유 변호사가 싱글거리면서 들어왔다. 확실히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인데 내놓고 확실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내가 기회를 보아 내 옆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소근거렸다.

“오늘 석방된 답니다. 지금 유 대위와 석 대위가 석방절차를 밟느라고 필동에 가 있답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고 가족과 함께 난로 불을 쪼이고 있으니 유 대위와 석 대위가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ʻ선생님, 그간 수고가 많으셨읍니다. 참모총장의 결재까지 받았으니 이제 곧 석방지시서를 발행하겠읍니다.ʼ
 
▲ 동아일보 (1962. 12.8.)
검찰관의 공소취하 절차와 심판부의 공소기각판정 절차를 두 대위가 함께 서류를 들고 다니면서 동시에 밟은 모양인데 약 1주일 전에 한국일보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장기영씨와 함께 석방하도록 어제 밤에 급작스럽게 최고회의에서 지시가 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후에 전 검찰관과 석 대위의 정성어린 환송을 받으면서 마지막 수갑을 차고 형무소로 돌아와 감방 청소를 깨끗히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안 부장과 담당이 와서 감방 문을 열면서 ʻ나오십시요. 석방입니다.ʼ라고 말해 주었다.

감방에서 쓰던 물건을 소제에게 나누어 주고 옷과 침구 보따리를 들고 감방을 나섰다. 옆방에서는 벌써 눈치를 챘는지 모두들 창문으로 와서 안녕히 가라고 치하하였다. “먼저 나가게 되서 미안하오. 몸조심 하라”고 차례로 인사하고 16방 앞까지 와서 내가 먼저 창문을 열고 최 군하고 불렀다. 문리과대학에서 나의 강의를 들은 제자인 최영오 군은 군대에 있을 동안에 애인에게서 온 편지를 상관이 뜯어보고 놀려주었다고 해서 그 두 상관을 총으로 쏴 죽인 죄로 사형이 확정되어 지금 그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는 몸이다. 그는 반가이 일어나 창문으로 내민 나의 손을 잡으며 “선생님. 이제 출감하십니까. 축하합니다.”라고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말하였다. “자네는 이미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지만 결코 집행은 되지 않을 터이니 그 때까지 몸 건강히 있다가 나와야하네.”라고 내 딴에는 격려의 뜻으로 말하였지만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그럴까요.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요.”라고 말하였다. 약 한달 후에 최 군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는 만나는 간수마다 그간 폐가 많았다고 인사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책임자로부터 정식으로 출감통고를 받은 다음에 편의실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형무소 정문을 나왔다.

교도소 밖에는 신문 기자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고 동국대학과 동아일보사에서 자동차를 보내 왔지만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있던 최영두 장군이 보내온 외국 세단차에 우리 부부가 타고 다른 차는 가족들이 타고 뒤따랐다. 나와 아내는 그 길로 조계사로 직행하였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던 이청담 스님은 곧 우리 부부를 법당으로 안내하였다. 부처님 앞에 감사드리고 다시 그 세단차를 타고 명륜동에 있는 그리운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중앙정보부에서 정식으로 구속된 이 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랑하는 작은 딸들을 128일 만에 껴안아 보고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님과 어머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오랫동안 부모님께 큰 죄를 지었다고 사과하였다.

* 12월 17일에 제 3공화국 헌법의 확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나는 형법총론(개정판)의 교정을 보면서 조용히 1962년(46세)의 년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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