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절치부심 (76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1963년(47세), 교도소에서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군사정부에 대한 나의 감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예상대로 군사정부의 승리로 돌아갔고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무궁화와 남채를 데리고 1월 6일에 해인사로 가서 기도도 하고 강연도 하면서 며칠 동안 쉬다가 1월 11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동아일보의 사설을 통하여 박정희 군사정권과 싸웠다.

2월 26일에 영채가 서울 법대를 졸업하였고 입학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서울대 대학원(석사과정, 국제법전공)에 입학하였다. 4월 16일에 옥채가 편입시험을 치르고 혜화에서 은석으로 국민학교를 옮겼다. 은석국민학교는 본래 박은혜여사가 설립한 학교였는데 경영난에 빠져 나와 아내가 주선하여 동국대학 재단으로 넘겨주었던 것이다.

10월 7일에는 아내가 동국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재가불교에 관한 연구>였다.

군사정부와 싸우는 동안에 나는 법과 독재의 이론을 구성하여 사상계지에 발표하였다.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한스 켈젠의 최근 저서 ʻPeace through Lawʼ가 번역되어 법을 잘 지켜야만 평화는 찾아온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회의를 느꼈으며 도리어 독재자는 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독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히틀러를 생각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박정희 군사정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상계에 실린 나의 글은 나중에 도쿄대의 스즈끼 게이후 교수에 의하여 일본말로 번역되었다. <현대한국의 헌법이론> (1984). pp. 273ff. 1948년부터 맡아오던 국제사법 과목을 나의 고대 제자였던 김진 군에게 맡기고 국제사법(4정판)을 박영사에서 출판하였다.

김진 군은 우리들이 기대한 만큼 학문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군정의 힘을 빌어 나를 서울대학교에서 몰아내는 데에 한 몫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미국으로 갔다가 1987년 지난날의 그의 제자들로부터 회갑기념논문집을 증정 받기 위해 잠시 서울에 온 일이 있었다.

1964년(48세). 동아일보의 사설을 통하여 계속해서 정부와 싸웠다. 나는 완전히 언론인으로서 탈바꿈하였으며 동아일보 맨처럼 행동하면서 같은 논설위원실의 홍승면 씨 등과 어울려서 무교동 일대의 술집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과로 신문사에서의 활동에만 힘썼기 때문에 학문연구에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박영사에서 출판한 법철학입문이 고작이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6.3 데모가 벌어지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6월 4일에는 대학과 중・고등학교, 국민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지는 교육부재의 현상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7월 7일에는 신태환 씨가 서울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나는 8월 6일에 동화사에 가서 효봉스님을 뵙고 왔다. 같은 평양사람이라 스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 해 주시었다. 일제 때에 평양에서 판사로 계시던 중 오판으로 무고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이 가슴 아파 불문에 귀의하였고 지난 불교정화 때에는 조계종 종정까지 지내셨으나 지금은 이 절에 방장으로 와 계셨던 것이다. 상제인 구산스님의 수도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내가 효봉 스님을 동화사에서 만난 것은 그 분에 대한 나의 마지막 친견이 되었다.
 
▲ 효봉스님 [출처 : 송광사]

12월 12일에 남채가 경기여자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1965년 (47세) 1월 29일에 무궁화가 숭의여고를 졸업하였다. 나는 학부형 대표로 졸업식장에 나아가 축사를 하였다. 나의 어머니, 나의 아내가 모두 숭의를 다녔는데 이제 또 내 딸이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하였다.

무궁화는 3월 2일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였다. 2월 8일에 남채가 서울대 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하고 3월 5일에 경기여중에 입학하였다. 2월 6일에 영준이가 서울 법대 졸업. 5월 12일에 영채는 일요신문 문화부 기자로 취직하였고 9월 30일에 서울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9월 30일에는 건이가 서울 법대를 졸업하였다.
 
집안에서는 이처럼 경사가 연이어 계속되었지만 나의 신상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유기천 씨와 또 한 차례의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0일에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고 4월 16일에는 서울대 법대가 휴교조치를 받을 정도로 학생데모는 격화되었다. 법과대학 학장인 유기천씨는 이러한 속에서 학생처벌에 열을 올렸다.
 
▲ 가족사진 (1965.)
 
교수회의에서 나는 그에게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학생 처벌에만 열을 올리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ʻ나처럼 학생을 사랑하는 교육자도 없을 것이요. 들어오기 힘든 법과 대학에 들어와 데모를 하다가 퇴학을 맞으면 그 사람은 일생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가 죽게 될 것이요. 죽기 직전에 가슴에 손을 대고 왜 일생을 망쳤는가 반성하면서 학생 때 데모하다가 퇴학 맞은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미리 이것을 막아 주니 이 얼마나 학생을 사랑하는 처사가 아니겠냐.ʼ 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분을 참지 못한 나는 동아일보 사설을 통하여 그를 공격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양심상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논설위원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법과 대학의 처사를 비난하는 사설을 여러 차례 썼다.

 
  석방 (75회)
  유기천 총장과의 충돌 (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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