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천 총장과의 충돌 (77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드디어 5월 13일에 유기천은 나를 불러 법과대학과 동아일보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라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통고를 묵살해 버렸다. 그는 결국 동아일보 편집국장 천관우 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신문사의 사설은 편집국장이 주관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3개의 사설이 법과대학 학장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인데 그 사설의 필자가 황산덕임이 판명되면 이것을 가지고 나를 공격하겠다는 심산에서 한 처사였다.

담당 검사는 김종경(후일 나의 밑에서 법무차관을 지낸 사람) 씨였다. 천 국장은 김 검사에게 불려가 사설은 자기의 소관이 아니라 고재욱 주필의 소관이라고 말하였더니 김 검사는 유기천 씨의 간절한 부탁이니 사설의 집필자만 알려주면 된다고 말하였다. 다음날 천 국장은 그 사설을 쓴 사람의 명단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그 명단에는 내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맥이 풀린 유기천은 고소를 취하하고 말았다. 그 간의 사정은 나중에 김종경 씨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5월 24일 법과대학 학생들은 유기천 씨를 배척하는 무기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유기천 씨는 학장실에 항의하러 들어오는 학생을 향하여 주거침입죄로 고발하겠다고 호령하였고 그리고 닥치는 대로 학생을 제적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것이다. 법과대학 학장실은 마치 수사본부와 같았다.

정부에서는 6월 22일에 드디어 전국의 대학에 휴교조치를 취하였고 그리고 한일 간의 여러 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러자 7월 12일에 364명의 교수들이 서울대 의과대학 안에 있는 함춘원에 모여 비준반대 교수선언을 발표하였다. 나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국회는 8월 11일에 여러 조약의 비준에 대한 동의를 가결하였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교수, 학생의 주장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협정 그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박 정권이 싫어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협정에는 찬성하되 다만 반대여론을 이유로 삼아 우리 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보다 더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겉으로만 반대하는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여하튼 한일 협정을 둘러싸고 학원이 시끄러워지자 문교부장관 윤천주 씨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 씨는 물러나고 대신 권오병씨가 문교장관에 유기천씨가 8월 27일에 서울대 총장 자리에 앉았다.

유기천 씨는 물론이려니와 권오병 씨도 검찰총장과 같은 자세로 문교부 일을 처리해나갔다. 그리고 국내의 정치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어갔다. 그러자 문교부는 9월 4일에 소위 정치교수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각 대학에서 2명씩을 골라내어 정치교수라 명명하고는 그들을 대학에서 추방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지난번 함춘원에 모인 교수들이 그 대부분인데 그러나 나는 이 명단에서 빠져 있었고 이 명단에 들어있는 교수들은 각 대학에서 즉시 해임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유기천의 입김이 또 계속되었다. 본래 정치교수의 명단은 청와대의 비상대책회의에서 작성된 것인데 그 명단에는 중앙정보부가 보고한 바에 따라 서울대 교수로서 황성모, 양호민 두 교수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유기천은 이 두 사람을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하였고 비상대책회의 측에서는 대신 두 교수를 서울대 교수 중에서 보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유기천은 황산덕과 김기선을 지명하였다.
 
▲ 필자 부부(1965.)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 정치교수의 명단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교수를 서울대에서 추방하는 데에는 대체로 양해가 있었다. 이 비상대책회의에 법무장관으로서는 민복기 선배가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사태를 막지 못해서 참으로 미안하다는 전화가 민 장관한테서 왔다.
 
유기천은 드디어 나를 징계해 달라고 기소하였고 이에 따라 문교부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 국장을 위원으로 하는 징계위원회가 9월8일에 열렸으며 다음날 9월9일에 나에 대한 징계파면이 결정되었다. 징계파면 한다고 결정을 내린 위원장과 위원들은 나중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상부의 지시가 있어 이런 결정을 내렸지만 자기들 모두도 분개하고 있어 법원에 가면 그래도 사리가 통할 것이니 빨리 행정소송을 제기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따라서 나는 부득이 서울대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문교부와 싸웠다. 이태희 선배가 변호사의 일을 맡아 주었다. 서울 고등법원에서는 즉각적으로 징계파면 효력정지가처분의 결정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해를 넘겨 1966년이 되었고 여름방학이 되자 유기천 씨는 서울대 총장 자격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미국으로 갔다. 그 사이에 권오병 장관이 나에게 김갑수 변호사를 보내 유기천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타협을 해보자고 접근해 왔다. 이리하여 나는 그의 제안대로 사표를 냈고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8월 25일 나에 대한 징계파면을 소급해서 취소하였고 동시에 동일자로 나의 사표를 수리하여 나는 의원면직의 형식으로 서울대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귀국해서 이것을 알게 된 유기천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난리를 쳤다고 한다. 나는 곧 퇴직금 신청을 하였다. 20년 가까이 서울대학에 있었기 때문에 그 금액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기천은 이 돈을 내주지 않았다. 총장이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몇 달 동안을 싸워서 받아낸 돈은 겨우 30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튼 지금까지 나는 공적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으나 이때부터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4월에 법문사에서 나의 형법총론(3정판)과 형법각론(개정판)이 나왔다. 그러나 쫓겨난 신세라 이 책들을 가지고 교단에 설 수가 없었다. 8월에 나의 공적신분이 회복되었으므로 나는 곧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9월12일 사무실은 조선일보사 뒤에 있는 유무형 변호사와 함께 쓰다가 얼마 후에 무교동으로 옮겼다. 법과대학 제자인 전태봉을 사무원으로 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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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직과 동아일보 논설위원 사임 (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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