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직과 동아일보 논설위원 사임 (78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1966년 (50세). 1964년에 독일의 벨젤교수가 일본 가는 길에 한국에도 들르고 싶다는 편지가 왔었고 나는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씨와 상의하여 그 분을 정식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때에 오지 않았고 1년 뒤에야 오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서울대학교 총장이 바뀌었고 새로 총장이 된 유기천은 자기가 초청한 사람이 아니므로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서울대학교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나는 그분의 체재비를 내가 개인적으로 부담하여 처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그 분은 4월 24일에 오셔서 5월 3일까지 머물다 갔다. 숙소는 반도호텔로 잡았으나 당시는 광화문 지하도 공사가 한창이었으므로 교통은 매우 불편하였다.

이 번 처사가 사람들을 격분시켰는지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이태희 변호사의 도움이 컸고 경희대학교 조영식 총장은 벨젤교수에게 명예법학박사의 학위까지 주었다. 벨젤교수는 경희대와 연세대에서 강연을 하였으나 서울대에서는 강의를 하지 못하였다. 세계적인 대학자인 벨젤교수의 강연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서울대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경주 등지도 가보았는데 그곳의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협조는 대단하였다.

벨젤교수는 5월 3일 출발에 앞서 김포공항에서 그간의 나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자기의 체재비를 공금으로 충당하지 못하고 내가 사적으로 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분은 참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여러모로 나를 위로 하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이것은 1965년에 있은 일이었다.

그 후 몇 달아 지나 나의 신분은 서울대 교수직의 의원면직으로 처리되었고 따라서 공민으로서의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로 돌아간 벨젤교수는 후에 독일 정부의 초청형식으로 나를 독일로 초청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설명한다.

4월 8일 나는 한국의 종교상 167매를 써서 신동아지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나로서는 하나의 역작에 속하는 글이다. 6월 4일에 장면박사가 서거하였다. 국민장으로 모셨다. 10월 15일에 효봉스님이 좌화하셨다. 앉은 채로 돌아가신 것인데 고승이 아니고서야 보통사람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울로 운구해와 화계사에서 다비식을 올렸는데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많은 사리가 나왔으며 분명한 것들만 골라내도 42과나 되었다.

11월 17일에 자화상이 신아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나는 지난날에 있은 동아일보 필화사건에 관하여 그 자세한 전말을 적어 놓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출판사가 없어져 오늘날 절판이 되어 그 내용을 이 회고록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12월 5일에 옥채가 이화여중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12월 10일에 내가 4년간이나 모시고 주역의 가르침을 받았던 김범부 선생이 돌아가셨다.
 
▲ 1966년에 출간한 <자화상>

서울대학교 총장이 된 유기천의 행태는 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특히 봄에 있었던 입학시험 때에 보여준 그의 횡포는 극심하였으므로 많은 학부형들이 진정 겸 항의 차 총장공관을 찾아갔다. 그런데 유기천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개를 풀어 내객을 쫓아 버렸다. 이리하여 점점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 그는 드디어 동대문 경찰서장에게 권총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가지고 있는 권총 한 자루로는 불안하여 한 자루를 더 가질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법과대학 출신인 우승용 군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마침 동대문 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서장으로 부터 이에 관한 정보를 얻어 동아일보에 <쌍권총 총장>이라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가 나가자 세상 사람들은 깜작 놀랐고 교육자로서 자질이 의심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 이전에 정기국회에서 야당이 내놓은 권오병 문교장관의 불신임 결의안이 많은 여당의원들의 가담으로 가결되자 문홍주 군이 후임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문 장관은 쌍권총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유기천 씨의 사표를 받았다. 그러나 유기천에 대한 박 대통령의 미련은 대단하였다. 비록 총장직에서 물러서게는 하였지만 교수로서는 그대로 대학에 남도록 문교부 장관에게 유기천 씨를 법과대학 교수로 임명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문 장관은 차일피일 하면서 유기천에 대한 교수 발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장관에게 재촉하였으나 문 장관은 그저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지방순시를 다녀온 대통령이 서울역에서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중 나온 문 장관에게 유기천 씨에 대한 교수 발령 내렸냐고 또 물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재촉을 받았으므로 문 장관도 할 수 없이 그를 법과대학 교수로 복직시켰다.

이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교수직에 복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의 때마다 학생들에게 박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김대중씨 밑으로 들어가 반정부 언동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던 것이다. 이리 하여 1972년 1월 3일 그는 중앙정보부에 의하여 강제출국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 [출처 : 유기천기념사업회 출판재단]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시해되고 옥중의 김대중 씨가 출감하자 미국에 있던 유기천은 귀국하여 김대중 씨 밑에서 한 동안 시끄럽게 하던 중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미국으로 피했다가 1987년 초에 다시 귀국하여 동교동 김대중 씨의 사택을 자주 출입하였다.

반면에 이병철 씨의 삼성재단이 성균관대학교를 인수하였고 전 서울대 상과대학 학장으로 계시던 권오익 선생이 총장이 되었다. 권 총장의 부인인 전 숙명여고 교장 문남식 여사는 바로 문홍주 군의 누님이시다. 그런데 권 총장은 나에게 성균대 법과대학장 직을 맡아 달라고 말씀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변호사 개업을 하여 어느 정도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원래 대학에 있던 사람이므로 성균관 대학 교수로 들어가 겸직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만 변호사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학장직만은 맡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그런데 12월 17일에 재단이사장 발령이 내려졌는데 거기에서는 나를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임명한다고 되어 있었다. 어째서 내 의향과 달리 이런 발령을 내렸는가 라고 물었더니 '학장 일 하면서 변호사 일도 하면 되지않겠는가'라는 것이 권 총장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삼성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아주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나는 동아일보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12월 31일자로 동아일보에 사표를 제출하였고 간부사원들의 성대한 환송연을 받으면서 파란만장하였던 5년 동안의 동아일보 시대를 끝마쳤다. 그 간에 썼던 많은 사설은 모두 별도로 보관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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