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독으로 여행 (79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1967년 (51세) 2월 6일에 옥채가 우석국민학교를 졸업하였고 3월 2일 이화여중에 입학하였다. 3월 3일에 나는 대한불교 신문의 주필 자리를 내 놓았다. 곧 장기여행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나는 학장으로서 입학시험 사무도 보았고 또 졸업식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나 벨젤 선생의 초청을 받아 오랫동안 독일을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제1학기 강의에는 시간을 넣지 않았다.

또 일요신문에 근무하고 있던 영채는 당시의 보사부 차관 김도창 씨에게 부탁하여 유학허가를 받아냈다. 이리하여 영채는 나와 함께 독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벨젤 교수의 알선으로 서독정부(DAAD)의 초청을 받은 나는 3월 9일에 영채를 데리고 김포를 떠났다. 공항에는 성균관대학의 많은 교수들과 사무직원들이 나와 우리들을 환송해 주었다. 동경에 잠시 내려 독일 항공기로 갈아타고 북극을 넘어 3월 10일에 본에 도착하였다. 앵커리지, 함브르크, 프랑크푸르트까지는 무사하였던 영채가 본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는 드디어 토하기 시작하여 많은 애를 먹였다.

공항에는 정종욱 군과 김웅이 마중 나왔다. 본의 외곽에 있는 입펜도르푸에는 외국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본대학에서 세운 아담한 게스트 하우스가 있었는데 우리들은 여기에 안내 받아 나는 아래층에 영채는 2층에 각각 시설 좋은 방을 하나 씩 얻었다.

3월 11일 정군이 와서 우리들을 본대학 총장실로 안내하여 여기에서 벨젤 총장을 정식으로 예방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대학 본부에서 좀 떨어져 있는 법과대학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벨첼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여기에서는 슈라이버 박사와 정종욱 군이 조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바드 고데스브르크로 가는 길옆에 있는 DAAD본부로 가서 도착 인사를 하고 다시 본으로 돌아와 한국대사관을 방문하였다. 대사는 최덕신 씨이고 대사관에서는 이상옥 참사관과 김윤택 영사, 정종욱 군과 김웅 군, 그리고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나와 있던 이기양 군 등과 자주 만났다. 그들은 교대로 차를 가지고 주말에 우리를 찾아와 영채를 태우고 도시의 여러 곳 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일정이었다.

1) 3월 18일 : 로렐라이. 바람이 몹시 불었다. 이기양 동반
2) 3월 19일 : 김윤택 군 차운전. 김웅 동반. 모젤강을 거슬러 가 트리에르 시내에서 칼 맑스의 고택을 보았다. 영채의 차멀미가 심하여 김웅이가 수고 많이 하였다.
3) 3월 20일 : 벨젤 교수의 안내로 지벤게비르그(Siebengebirge) 드라이브. 벨첼 교수의 따님인 베티나도 동반. 영채는 한복을 곱게 입고 따라 나섰다.
4) 3월 24일 : 보쿰과 독일의 공업지대 루르지방도 돌아보았다.
5) 3월 26일 : 아헨지방과 중세기 초의 칼대제의 궁전을 가보았는데 굉장한 유물이었다.
6) 3월 27일 : 마부르크에서는 바람이 굉장히 불어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처음 서울을 떠날 때에는 정종욱 군의 부친이 나를 찾아와 정 군이 지금 독일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선생님이 가셔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결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영채를 데리고 독일에 갔더니 그 독일 아가씨는 우리를 아주 경계하였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자기네들의 결혼을 서울에서 반대한다고 해서 약까지 먹은 일이 있는 그 아가씨가 가엽게 느껴져 나는 마음을 돌려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3월28일 우리 대사관에서 정종욱 군과 마틸데 슈미트(Mathilde Schumidt)양의 결혼식이 열리고 내가 그 주례를 섰다. 나는 그들이 신혼여행 차 바덴바덴으로 떠나는 차를 탈 때에는 합장을 하고 그들의 앞날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3월 30일 영채가 스톡홀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독일을 떠났다. 귀여운 딸을 미지의 나라로 보내는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서운했다. 나는 본에 혼자 남게 되었는데 스웨덴으로 간 영채가 곧 후회가 된다고 연락이 왔다. 동시에 서울에서 온 편지를 보니 영채가 김웅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린 모양인데 같이 있으면서 아버지로서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고 나를 공박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나중에 영채한테 가기로 작정하고 그리고는 그가 다시 독일에 돌아올 수 있도록 벨젤 교수와 김웅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이상옥 군의 안내로 하이델베르크에 다녀왔다. 이곳은 나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 4월 14일에는 최덕신 대사와 함께 프랑크프르트로 갔다. 독일에 와있는 우리나라 간호원들의 축제에 초대되어 간 것인데 이국땅에 와서 고생하는 천여 명의 우리나라 간호원들 앞에 나아가 격려사를 하면서 약소국의 설움에 북받쳐 나도 모르게 눈물짓기도 하였다.
 
▲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독일어를 배우고 있다 [출처 : 재외동포의 창]

4월 16일부터 5월 6일까지 정군을 데리고 서독 여행을 하였다.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니 동, 서독의 생활수준의 차이가 완연하게 보였다. 자유대학에서는 최정호 군을 만났고 또 하인츠 교수를 만나 점심을 같이 하였다.

독일에서는 지금 동성애자 처벌을 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하여 대학, 정부, 국회가 온통 야단인데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그 교수가 물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은 동성애를 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사회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몹시 부러워하였다.

베를린에는 마틸데의 여동생 마리아가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가 와서 우리들을 안내하여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 술집에도 가고 춤도 추었는데 나는 춤을 잘 추지 못 하였지만 우리들의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또한 최 군의 안내로 동백림을 돌아오는 관광버스를 예약해 놓았다. 그러나 출발 직전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그 버스를 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때에 만일 내가 그 버스를 탔더라면 귀국 후에 큰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4월 20일 함부르크대학에 가서 헹켈 교수를 찼았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을 그대로 법철학에 끌고 들어와 교과서를 써서 유명해진 분인데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와 있는 총영사 박창남 씨와 전 성대교수 박문복 씨도 만났다. 박 교수가 서울에 있을 때에 발표한 논문을 내가 호되게 공박한 일이 있었고 그 후 박 교수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함부르크에 와보니 그가 여기에서 상사회사에 취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안내로 시내를 구경하였다. 또 이 총영사의 안내로 이곳의 유명한 레파반(Reeperbahn) 지구를 돌아보았다. 종로구만한 크기의 구역인데 독일이 자랑하는 대공창가인 것이다. 원칙으로 공창을 금지해 놓고 그리고는 독일 안에 있는 모든 창녀를 이 한 곳에 몰아 놓았다는 점에서 유명한 곳이다.

 
  서울대 교수직과 동아일보 논설위원 사임 (78회)
  벨젤 교수 등 지인을 만나고 귀국 (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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