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젤 교수 등 지인을 만나고 귀국 (80회)
  제12장 애증의 시대와 세월

4월 22일 하노버로 갔다. 이곳이 고향인 슈라이버 박사가 여기까지 와서 자기 집에서 점심대접을 하였다. 또 여기에서 공부하고 있는 영준의 친구 한애삼의 기숙사도 찾아가 보았다. 4월23일은 뷔르츠부르그로 갔다. 옛날 계정식 씨가 이곳에 와서 음악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1박하고 다음날에는 중세기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로텐부르그로 갔다. 이곳의 광경은 평생 잊을 수 없다.

4월25일. 뉘른베르그에는 심헌섭 군의 처가 여기에 와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역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히틀러가 나치스 당대회를 개최한 곳으로 유명한 광장에 가보았다. 고성 옆에서 사먹은 숯불로 구운 소시지 맛은 참 좋았다. 4월 26일. 기차로 에어랑겐에 다녀 왔는데 지펠리우스 교수의 집에 초대 되었다.

4월 27일 로젠베르크 도착. 다뉴브강에 접해 있는 오랜 도시로 크라프트 여사가 구석구석 안내해 주었다. 케플러의 생가도 가 보았다. 이곳에 새로 생긴 대학에 벨젤선생의 제자인 히르쉬가 교수로 와 있었다. 본에 있는 그의 집에 초대받은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그를 또 만났다.

4월 28일 뮌헨 여기에서는 김종호 씨와 박종서 교수를 만났고 또 본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마틸데를 데리고 바이스와 노이슈반스타인등 남독 일대를 구경 하였다. 알프스 북쪽 기슭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5월1일에는 이곳 독일 학생의 안내로 다카우를 방문해 히틀러 때에 만들어진 유대인 수용소로 유명한 가스실 등을 돌아보았다. 이 안에서 이처럼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다카우 주민들은 몰랐다고 그 독일 학생은 변명하였다.

5월2일~3일. 뮌헨대학으로 마우라하교수를 찾아가 환담하고 이곳을 떠나 기차로 남독을 훑어 프라이부르그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날에 나의 스승 미우라 선생이 공부하던 곳이고 또 몇 년 전부터 심헌섭 군이 와 있던 곳이며 나중에 정종욱 군이 근무하다가 죽은 곳이다. 나는 우선 에드문트 훗셀의 묘소를 찾았고 또 요섹크 교수를 만났고 에리크 볼프의 연구실을 방문하였다. 하이덱커 교수는 여행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였다.

이곳 대학에는 차인석, 계희열 군이 와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숙소도 가 보았다. 고데스부르그에 가서 이기양 군이 쓰던 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 군은 얼마 전에 국제 여자농구 시합 취재차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간 후에 행방불명이 됐으므로 그가 살던 집에서 김웅 등과 함께 하루를 지낸 것이다. 다음 날 입펜도르프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갔다.
 
▲ (경향신문 1967. 5.15.)

5월 7일 코헨과 코블렌츠로 드라이브 하였다. 5월9일 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동서법사상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약 1시간 동안 강의하였다. 정종욱 군이 통역을 맡았으나 통역이 신통치 않아 옆에서 듣고 있던 김웅이가 대신하였다. 이 강의 시간은 벨젤 교수가 자기의 강의 시간을 빌려준 것이었다.

5월 15일 폭음을 하였다 지난날 본대학에 있는 한국인 학생회 회장의 일을 맡아온 배준상, 공광덕 그리고 김웅 이세명이 나를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본과 쾰른을 두루 다니면서 12시간 동안이나 마셨다. 다음날 아침 6시에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2시간 가량 잠을 자고 아침 식사를 먹은 후에 9시에 벨젤 교수를 방문하였는데도 도무지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의 술은 좋았던 것이다.

5월 19일 영채의 일을 벨젤 교수와 김웅에게 부탁해 놓고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으로 갔다. 여기에서 영채와 우리나라 대사 유재흥 씨를 만나 시내 구경을 하였다. 이 나라는 성적으로 지나치게 개방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5월23일 영채에게 독일로 갈 것을 제시하고 여러 가지 주의 할 사항을 일러 주고는 파리로 갔다. 떠나는 비행기를 향해 애절한 심정으로 손을 흔드는 영채의 모습을 보고 그를 향해 끝도 없이 염불하면서 합장하였다. 그 후 영채는 곧 독일로 가서 벨젤 교수가 주는 장학금으로 본대학에 입학하였고 또 김웅의 보호를 받아 나중에는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지난번에 못 보았던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를 가보았고 마침 이집트 대통령의 배려로 이곳에서 개최된 투탄카멘 왕의 금색 찬란한 유물전시회도 보았다. 나의 평고 동문인 신기형 군의 동생 신기흠 참사관의 안내를 받았으나 비가 계속해서 왔기 때문에 다른 구경은 별로 하지 못하였다. 다만 이수영 대사의 안내로 교포인 장 씨가 경영하는 중국음식점에 갔었는데 장 씨의 말로는 모나코의 레이니에 왕과 그레이스 왕비, 그리고 여배우 잉그릿드 버그만이 이 집에 자주 와서 식사를 한다고 자랑하였다. 이항령 형의 아들도 이 식당에서 만났다.

5월 27일 로마로 갔다. 한 번 온 일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시내 구경은 하지 않고 관광버스로 나폴리와 폼페이 유적 그리고 쏘렌토를 가 보았다. 5월29일 카이로로 갔으나 공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반나절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나 시내에 가지는 않고 그대로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후에 이스라엘과 이집트사이의 그 유명한 육일전쟁이 터졌다. 만일 내가 시내로 들어갔더라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발이 묶여 많은 고생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내렸으나 이곳도 너무 더워서 잠시 땅에 내렸다가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5월30일 드디어 동경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온 사람은 흑사병 위험 때문에 공항에서 격리 수용되었으나 나는 그냥 트랜짓만 하였기 때문에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2일간 푹 쉬고 주일대사 김동조 씨의 주선으로 롯데의 신 사장과 일본인 국회의원 2인과 함께 호화스런 요정에서 술자리를 하였다. 6월 2일 80일이 넘게 여행하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왔다.

1967년 7월 8일에 동백림 간첩사건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잘 못 집은 사건으로 결국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김웅도 이 사건의 혐의를 받아 서울에 끌려와 있었으나 결국은 혐의가 없음이 판명되어 7월10일 석방되었다.

나와 아내는 그를 광화문에 있는 일식음식점으로 불러 식사를 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그 간 영채는 독일에 혼자 있었으나 7월24일에 웅이가 다시 독일로 감으로써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영준은 그동안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로 동대문과 청량리 경찰서를 출입하며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가 7월27일부터 일정기간 지방주재 명령에 따라 대구로 발령 받았다.

8월9일 선친께서 중풍으로 졸도하셨다. 원의 집에 계시다가 소주를 마시고 돌아오신 뒤에 냉수욕을 하시고는 쓰러진 것이다. 양약, 한약과 침을 집중적으로 쓴 결과 몇 달 뒤에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다. 이때 선친의 연세는 71세로 우리들은 매우 걱정하였지만 그 후 별 말썽은 없었다. 독일에서 돌아와 법정대학장으로 있으면서 토인비 등을 공부하였고 또 아침마다 삼청공원에 산책하였다.

 
  다시 서독으로 여행 (79회)
  성균관대학 법정대학장으로 재직하며 (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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